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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 집의 가훈

◎ 행복한 삶/1. 여행-국내

by 최안동(圓成) 2014. 6. 2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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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의 시작

 

신라 건국의 근간인 육부촌중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공이 경주 최씨의 득성조이며 당나라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토황소격문으로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우리 국학의 조종인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이 시조이다.

경주 최씨 27개 계파 중 최치원 선생의 11대손인 사성공파 파조이신 최예의 6대손 가암파(별칭 정무공파)인 최진립 장군이 경주 최부자의 파조이다.

 

        

                          [사랑채 전경]                                                                 [안채 전경]

 

        ◎ 최부자 집의 가훈

“관직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한마디로 정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다.

조선시대 진사라는 신분은 초시 합격자를 가리키는데, 벼슬이라기보다는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요건에 해당한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감옥이 가까워진다는 영국 속담처럼, 조선시대는 벼슬이 높아질수록 자의반 타의반으로 당쟁에 휩쓸리기 쉬웠다.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만석은 쌀 1만 가마니에 해당하는 재산이다.

돈이라는 것은 한번 모이면 가속도가 붙는 ‘이상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만석 이상의 재산불가 원칙에 따라 나머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였다.

 

“흉년에 땅을 늘리지 말라”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어 아사 직전의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쌀 한 말에 논 한 마지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우선 먹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논 값을 제대로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흰죽 한 끼 얻어먹고 논을 내놓았다고 해서 “흰죽 논”이란 말도 있었다.

헐값에 논을 넘겨야만 했던 사람들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두 수 앞만 내다보면 그 원한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것은 불문가지다. 최씨 가문은 도덕성과 아울러 고준한 지혜를 가졌던 듯하다.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조선시대는 삼강오륜과 예를 강조하다 보니 사회분위기가 자칫 경직될 수 있었다. 그 경직성을 부분적이나마 해소해주는, 융통성 있는 사회 시스템이 바로 과객을 대접하는 풍습이 아니었나 싶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교동에서 사방 100리라고 하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고, 남쪽으로는 울산까지, 북으로는 포항까지의 영역이다.

주변이 굶어 죽고 있는 상황인데 나 혼자 만석 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부자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소작수입 가운데 1천석을 주변 빈민구제에 사용한 것도 이런 차원이다.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 남자가 아니라 안방마님이 가지고 있었다.

재산관리의 상당 권한을 여자가 지니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런 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 정신이 중요하다.

최 부잣집 여자들의 절약정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화다.

 

이상 여섯 가지 원칙이 최부자 집의 제가(齊家)하는 철학이며 삶의 지혜라 생각해봅니다.

 

     

 

[월정교 전경 - 복원 공사 중]

 

삶을 다스리는 풍요의 비밀 - 노블레스 오블리주

 

중소기업 융합 안동교류회 6월 월례회 행사는 경주 최부자 집을 찾아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이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그들만의 특별한 노하우와 인간의 본질, 욕망을 절제하고 겸손과 나눔을 실천하면서 올곧은 참부자의 삶을 살아온 그들의 살맛나는 세상을 들여다보고 왔습니다.

 

[월지 전경]

 

 
[2014. 06. 17. 圓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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