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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석굴(龍門石窟)

◎ 행복한 삶/2. 여행-해외

by 최안동(圓成) 2013. 8. 1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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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석굴(龍門石窟)

 

둔황의 막고굴(莫高窟), 대동의 운강석굴(雲崗石窟)과 함께 중국 3대 석굴 중 하나인 용문석굴은 깎아지른 절벽1.5km에 새긴 불상들로 하남성과 낙양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명성이 대단하며, 명성에 걸맞게 유네스코는 2000년 이 석굴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이 장대한 용문(龍門)석굴은 뤄양의 최대 볼거리로 수많은 관광객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엄청난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마다하고 밀려오는 인파속에 나그네의 힘든 여정도 시작됩니다.

여행이라는 과정이 항상 유쾌한 일정만 있는 것은 아니고, 때로는 외롭고 힘들어 하면서도 시간과 금전을 투자하여 떠나는 것이 여행이랍니다.

여행이나 인생이나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도 가야 할 길이라면 떠나야 하는 것이 여행이고 삶이기에 오늘도 울~마눌님과 더위와 씨름하며 용문석굴로 걸어서 들어갑니다.

 

 

  

 

이곳의 시작은 북위 효문제 때에 대동에서 이곳 낙양으로 천도했을 때부터 운강석굴을 계승하는 형식으로 처음 뚫어졌고 그 작업이 동서위, 북제, 북주, 수, 당에 이르는 400년간 계속되었다.

용문석굴은 불교예술의 총아일 뿐 아니라 빼어난 건축, 조각미술의 집합체이다.

 

 

  

 

이하 강변 좌우의 용문산과 향산(香山) 암벽에 1.5㎞에 걸쳐 조성된 용문석굴은 5세기 말(북위)부터 당나라 때인 9세기까지 무려 400여년간 깎고 다듬으며 세워졌다.

그 결과 2345여개의 석굴, 2800여개의 비문, 50여개의 불탑, 10만개 정도의 조각상이 남아있다.

지금과 같은 특수 장비가 없던 시절, 까마득하게 높은 절벽에 매달려 큰 굴을 파고, 세밀하기 이를 데 없는 불상을 새긴 투혼에 여행자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불상은 10여m가 넘는 것부터 2~3㎝ 손톱 크기에 불과한 것까지 실로 다양하다.

 

      

 

  

 

 

오늘따라 날씨가 너무 덥습니다.

중원의 내륙인지라 기온이 무려 40°c에 이른다는 가이드의 일기예보입니다.

이하강변의 수양버들나무 그늘아래에서 시원한 물 한 잔으로 온 몸에서 품어져 나오는 열기를 달래보지만 잠시일 뿐 가이드의 재촉은 계속됩니다.

 

 

      

 

 

용문석굴 중 가장 유명한 불상은 당(唐) 고종 때 시작돼 황후 무씨(後의 '측천무후')가 주도한 봉선사(奉善寺)의 거대 불상군이다.

이를 보지 않고는 용문석굴을 봤다고 할 수 없다고 할 만큼 단연 압권이다. 특히 폭35m 석굴 안에 있는 대불(비로자나불)은 높이가 17.4m에 이르며 귀 길이만도 1.9m나 된다.

675년에 완성돼 절정기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불상은 수려한 용모에 인자한 미소가 인상적이다.

거액의 자금을 대며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측천무후를 모델로 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곳곳에서 보수공사가 많이도 진행되고 있다.

불상들이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면서 훼손되었다고 한다.

특히 불상머리를 소장하면 복이 온다는 미신 때문에 머리가 떨어져나간 불상이 더 많다.

또 도굴에 의한 불법 반출과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한 파손이 많아 계속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보존되기를 바라면서 백거이 묘지가 있는 향산으로 가기위해 이하 강을 건너다.

 

  

 

 

 

백거이 묘는 맞은편 향산에 있으며, 용문산과 서로 마주하고 있다.

당대 풍유시인 백거이는 두보, 이백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3대 시인의 한사람으로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또는 향산거사(香山居士)이다.

 

      

 

 

백거이의 묘(白居易墓)

향산 용문교 왼쪽 산기슭에 자리 잡은 백거이의 묘인 백원은 백거이가 생전하던 839년에 중풍으로 고생하면서도 향산에 왕래하며 “취음선생전(醉吟先生傳)”등의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며,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무덤을 조성한 곳이다.

 

 

특이한 무덤

경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돌아가면 평평한 곳에 있는데, 직경이 10m안팎, 높이 2.5m쯤 되고 밑 둥에는 화강암으로 호석을 둘렀으나 특이한 것은 무덤의 가장 자리에는 나무와 풀들이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평소 백거이가 지었다는 한 구절의 시를 보면 알 것 갔다.

 

“저 멀리 들판의 풀들은

 

해마다 스러졌다가 다시 피어나는구나.

 

들불도 이 풀들을 다 태우지는 못하리.

 

봄바람이 불어오면 풀들은 또다시 살아나리니.“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떠나도 떠난 것이 아니라고.....

 

 

삶이란 것이 참으로 파란만장한 세월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백거이가 남긴 시 한수가 이렇게 민초들의 마음을 잘도 표현했습니다.

국보(國寶)는 건물이나 문화재가 아니라 소신 있는 리더라는 생각이 머리를 조아리게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백거이와 같은 위대한 사람이 태어나서 보신과 안위에 젖어있는 리더가 아니라 보민과 보국의 정신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지도자가 하루빨리 탄생되어 국정이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되어 온 민초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곳 뤄양을 떠납니다.

 

  

  [2013. 8. 10. 여행수기 - 뤄양의 용문석굴 추억들~. -圓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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