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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 생가를 찾아서~~~

◎ 행복한 삶/1. 여행-국내

by 최안동(圓成) 2010. 11. 1.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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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 생가를 찾아서~~~

 

[홍의장군 곽재우생가 전경]

오늘은 나그네가 고향(2010. 10. 30)을 가면서 국도변에 위치한 홍의장군 곽재우생가를 찾아봅니다.

홍의장군에 대한 백과사전의 검색자료를 준비하여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마을에 도착하여 곽재우 생가를 찾아봅니다.


[백가자료] 곽재우(郭再祐, 1552년~1617년)는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다.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활동하여 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여러 번 승리한 공로로 찰방, 조방장 등을 지낸 뒤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김덕령 등의 의병장이 무고로 희생되는 것과 영창대군의 죽음을 보고, 벼슬을 여러 번 사퇴하였다. 본관은 현풍(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곽재우(郭再祐)는 1592년 음력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연이은 관군의 패배와 선조의 의주(義州)로 피난 소식이 날아오자, 같은 달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2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 활동으로 의령·창녕(昌寧)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일본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하였고, 일본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시민의 진주대첩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붉은 비단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아군의 선두에서 싸웠기 때문에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렸다.


1592년 5월 함안을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 도하작전을 전개하는 왜군을 추격, 대승을 거두었다. 붉은 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감찰사 김수와의 악감정 때문에 누명을 쓰고 체포, 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한 김성일(金誠一)의 특별 건의로 석방된 후, 조선 정부는 그의 의병 활동의 공을 높이 사 같은 해 음력 7월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이라는 무관직을 내렸고, 음력 10월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음력 12월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종식되자 벼슬을 버리고 다시 은둔 생활로 돌아갔다.

 

 

모함으로 인해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체포당하기도 했으나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그러나 의병장 김덕령은 끝내 이몽학의 난과 관련된 누명을 벗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이 일로 곽재우는 사실상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었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파행으로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재발할 위험성이 커지자 조선 정부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 그해 음력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하였다. 

 

    

[복원된 생가 전경]

국도변에서 약 500m정도 거리의 세간리 마을은 양지바른 산 아래 옹기종기 촌락을 이루며 생활하는 시골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2007년도에 복원되었다는 장군의 생가 앞에는 500여년 세월을 간직한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뒷산에는 붉게 영글어가는 감나무의 풍경과 서산으로 넘어가는 석양의 붉은 자태는 홍의장군의 에너지가 아직도 맴도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복원된 생가는 조선 초기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안채, 사랑채, 곡간 등 7동의 건물과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동네 초입 위나무 전경]                                                     [첫 의병을 일으켰던 곳]

장군이 태어났던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정자나무)에 북을 매달아 치면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때가 1592년 4월 22일 우리나라 첫 의병인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별도의 정각을 건립하여 큰 북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동네 어른분의 말씀에 의하면 이곳이 진짜 장군의 생가이나 부지가 협소한 관계로 지금의 장소에 복원되었다는 말씀도 하였습니다.


장군께서는 의병들에게 붉은 옷을 입게 하여 누가 곽재우 장군인지 헷갈리게 하였다는 전술과, 50m~80m정도 되는 조총의 사정거리를 파악하여 130m정도 날아가는 활을 개발하여 왜적을 무찔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홍의장군처럼 훌륭하신 의병장이 있었기에 울~대한민국의 존재가 세계에서도 평가받는 국가가 되었답니다.

 

                    

                        [충의문 전경]                                                                   [의병탑 전경]

이젠 국도를 따라 의병탑이 자리한 충익사에서 사진 한 장 남깁니다.

충익사(1978년 12월 22일 준공)에는 곽재우 장군과 17장령 및 수많은 의병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의령군에서는 매년 4월에 의병제전을 열고 첫 의병을 일으킨 4월 22일 아침에 충익사 사당에서 추모제향을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도 홍의장군의 애국심을 느끼면서 역사공부를 하고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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