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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건설협회 경상북도회 해외투어(ⅱ)

◎ 행복한 삶/2. 여행-해외

by 최안동(圓成) 2014. 10. 1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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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건설협회 경상북도회 해외투어[투어일정 : 2014. 9. 26(금)]

 

■ 화청지와 양귀비

화청지는 서안에서 동쪽으로 약 30km떨어진 곳에 있다. 여산을 등에 업고 아담하게 들어서 있는데, 당 현종과 양귀비와의 사랑이 어려 있는 곳이다.

또 이곳은 온천지로 유명해 황제들이 온천을 즐겼다고 한다. 내부에는 양귀비가 목욕을 하던 해당탕과 현종이 목욕을 하던 연화탕등이 복원되어 있다.

 

        

 

 

■ 화청지 - 역사의 영욕이 서려 있는 곳

역사에 의하면 서주 시대에 이곳에 여궁(驪宮)을 세웠으며, 진대에는 여산탕(驪山湯)이라 하였다. 당나라 현종 시대에는 이곳을 더욱 크게 넓혔고 이름을 화청궁(華淸宮)이라 고쳤다.

 

 

 

현종은 745∼755년 사이에 매년 10월이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양귀비 자매와 측근 대신들과 함께 화청지로 와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야 장안으로 돌아갔다.

당나라의 시중에는 화청지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한 문학적 소재가 되기도 했다.

 

        

 

 

지금의 모습은 화재로 불타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양귀비에게 비운을 안겨준 안사의 난은 이곳을 지나면서 화청지를 황폐화시켰다. 지금의 것은 예전의 크기의 7분의1 정도만을 복원한 것이라 하니 당시의 화려함이 상상이 된다.

화청지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를 유지하며 다량의 광물질을 포함하고 있어서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 한다. 양귀비가 장기간 미모를 유지한 것과 당태종이 육칠십에도 여전히 정력이 왕성했던 것은 화청궁에서 장기간 약수로 목욕을 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곳은 또한 1936년 12월에 시안사건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장개석이 공산당 토벌을 명하려 왔다가 국공합작을 주장하던 장학량에게 쫓겨 이곳 여산에 숨어 있다가 결국 체포되었던 곳이다.

 

 

 

 

             ■ 양 귀 비

본명은 양옥환

본래는 현종의 아들인 수왕의 비였다.

현종의 며느리인 셈이다. 그런데 자신의 아내인 무혜비가 죽자, 시아버지란 체통도 망각하고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도를 중시하는 중국에서는 매우 지탄받을 일이었는데, 이를 무마하기 위해 현종은 일단 양귀비를 도교의 승으로 출가를 시킨 후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 22세, 현종은 57세였다. 그녀는 얼굴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노래와 춤도 뛰어났고, 특히 비파의 명수였다.

음악에 관한 취미가 맞았던 게다. 게다가 머리 회전이 빨라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렇듯 한날한시에 같이 죽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현종이 양귀비에게 푹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한 탓에 나라가 흐트러지고, 결국 안록산이 '안사의 난'을 일으켜 궁지에 빠진다.

 

         

 

당시 서안에는 왕의 근위병 4천여 명이 있을 뿐이었기에 현종은 서쪽의 사천성으로 도주해야 했다. 그들이 지금의 마위파 부근에 왔을 때, 이번엔 같이 가던 호위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호위병사들은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일 것을 강요하고 결국 현종은 사랑하는 양귀비에게 스스로 목을 맬 비단천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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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양귀비의 나이는 37세였다. 지금도 마위파의 그 자리엔 양귀비의 무덤이 있다. 흥미 있는 사실은 흙무덤의 높이가 예전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양귀비 무덤의 흙으로 팩을 하면 피부가 좋아지고 예뻐진다는 믿지 못할 소문을 듣고 무덤의 흙을 마구 가져갔기 때문이란다. 하는 수 없이 지금은 돌로 봉분을 싸버렸다.

 

 

한편 서시,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양귀비지만 지금의 미인의 기준과는 좀 달랐던 것 같다.

당시 왕실의 시인으로 있었던 이태백은 양귀비에 대하여 '허리가 굵어 몸매가 아름답지 못하고 용모도 그리 신통하지 못하다'는 내용의 시를 썼다.

이 시를 읽고 발끈한 양귀비가 현종을 충동질하여 이태백을 먼 나라로 귀양 보내 버렸다. 귀양까지 보낼 정도면 이태백의 시가 아마도 맞았던가 보다.

 

         

 

■ 장 한 가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뜨거운 사랑을 노래한 시 '장한가(長恨歌)'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次恨線線無絶期[차한선선무절기] : 이 한은 끝없이 계속 되네

 

* 비익조 - 암컷과 수컷이 날개가 한 쪽뿐이어서 짝이 없으면 날 수 없는 전설의 새.

* 연리지 -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으로 효성이 지극함을 나타냈으나

               현재는 남녀 사이 혹은 부부애가 진한 것을 비유. 비익조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장한가는 당나라 때 백거이가 지은 장편 서사시이다.

당 현종(712-756)이 양귀비와 사랑을 나누고 죽은 지 50년이 지나 백거이 나이 35세에 어느 날 친구 왕질부와 진홍이라는 사람이 그를 찾아와 선유산에 놀러를 갔는데 거기서 당 현종 이융기와 양귀비와의 로맨스가 화제에 올랐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왕질부의 제의로 백거이는 시인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시로...

진홍은 산문으로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신화적인 내용으로 애절하게 썼다고 한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모두에 대한 상생의 수단이 되어야 하고 모두에게 좋은 모습일 수 있어야 할 것인데 당 현종은 그런 의미에서 한 여인에게 눈이 멀어 나라를 파멸로 이끈 군주로 역사는 말한다.

백거이는 당 현종과 양귀비 두 사람만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표현한 글이 현세에 왔어 감동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를 생각해봅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나를 더욱 행복하게 합니다』

 

[2014. 10. 15. 비파연주 감상 -圓 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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