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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四川省 成都(청두)

◎ 행복한 삶/2. 여행-해외

by 최안동(圓成) 2014. 10. 1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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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四川省 成都(청두)

 

이번 여행의 종착지점인 청두에 도착(2014. 8. 31)하다.

20일 동안 오지여행을 하면서 먹는 것, 쉬는 것, 잠자는 것, 기타 등등 부족함과 힘겨움도 많았기에 사천성 성도(2일간)에 있는 동안 먹을 것 배불리게 먹고 무후사, 진리거리, 두보초당, 천극공연 등을 여유롭게 즐겨보자.

 

 

 

청정지역에 있다가 성도로 들어오니 공기도 나쁘고 기온도 높다.

하지만 이곳 청두에서 머무는 시간은 2박1일로 짧은 일정이기에 바쁘게 옮겨 다닐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유스호스텔에 짐을 풀고 제일먼저 사천성 천극이 유명하다기에 공연장으로 향한다.

내용은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유명하다기에 비싼 요금을 내고 자리부터 차지하다.

공연장에서 제공하는 중국 짜장면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공연을 본다.

공연내용은 쓰촨 성에서 이루어진 지방예술극인 인형극, 연극, 악기연주 등등 다양하게 구성된 공연이며, 특히 변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얼굴모습이 바퀴도록 연출하는 것이 특색이라 하겠습니다.

 

 

 

 

 

     무후사(武侯祠) [백과사전]

무후사(쓰촨 성 청두시)의 무후란 충무후(忠武侯)라고 시호가 내려진 제갈량을 말하고, 그를 모시는 사당을 무후사라고 한다. 그러나 후세의 삼국지나 삼국지연의 등에서 제갈량 이외의 촉한의 무장이나 가신, 또한 촉의 임금인 유비나 그의 후대를 이은 유선까지 모시게 되었다고 전한다. 보통 군신을 같이 모시지 않은 관례로 인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유선의 제위는 나라를 말아먹은 어리석은 군주라고 하여 남송 때 폐사(廢祀)시켜 버렸다. 서기 223년 유비의 능묘가 조성되었다.

 

         

 

         

 

촉나라의 이웅은 무후사를 만들고, 지금의 장소에 옮겼다. 현재와 같이 제갈량과 유비를 같이 모시는 사당으로 정비된 것은 명조에 이르러서이다. 현재 남은 옛날 건축물은 청나라 때 조성된 것이고, 성도 무후사 박물관으로 196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사당 내에는 관우, 장비 등의 촉한 무장들의 상이 나란히 있고, 내부에는 제갈량의 소상이나 유비의 소상이 있다. 모두 후세의 작품으로 삼국지연의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인 것이다.

 

 

         

 

무후사 경내로 들어가면 유비전과 제갈량전, 촉한의 문·무관 28위의 동상 및 '제갈고(諸葛鼓)'라 칭해지는 북, 동고(銅鼓) 등의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 유비전은 정문으로 들어가 최초의 건물인데 황금의 유비상이 안치되어 있고 벽에는 공명의 정치·군사상의 전략사항으로 유명한 융중대(隆中對)의 액자가 걸려있다. 관우, 장비 등의 문·무관 28인의 상은 옆 동(棟)에 있고 벽에는 그들의 문장과 업적을 기리는 액자와 연(聯)이 전시되어 있다. 제갈고는 공명이 남쪽을 정벌하면서 만든 것으로 낮에는 그것으로 밥을 짓고 밤에는 경보를 발했다고 한다. 또 무후사 뒤편에는 제갈공명의 묘가 위치하고 유비의 묘인 혜릉(惠陵)과 문장, 서법, 석각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꼽힌 당비(唐碑)가 있다.

 

         

 

         

 

무후사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삼국시대의 사당으로 여겨지며 1961년 국무원에 의해서 전국 중요 문물 보호단위로 정해졌다. 무후사가 정확하게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6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존재하는 무후사는 청대 강희 11년(1672년)에 옛 터 위에 중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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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두 진리거리

 

무후사 뒷골목의 아기자기한 가계들과 맛 집으로 꾸며진 진리거리 풍경입니다.

진리거리는 무후사 옆에 크지 않은 규모로 자리하고 있다. 촉한 시대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으로 550m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서 전통양식의 집들이 모두가 상점들이다. 상해의 주가각 모습과 흡사한 곳으로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주변거리를 둘러보지만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인하여 정신이 없다.

진리거리에는 야외 푸드점이 다양하게 있고 음식 값도 저렴하여 조금씩 맛보는 재미도 쏠쏠한 곳입니다.

 

 

         

 

 

  두보초당(杜甫草堂) [백과사전]

두보(杜甫) 자는 자미(子美). 이백(李白)과 더불어 중국의 최고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두릉(杜陵)의 포의(布衣)' 또는 '소릉(少陵)의 야로(野老)'라고 자칭한 것은 장안(長安)의 남쪽 근교에 있는 두릉 땅에 두보의 선조가 살았기 때문이다. 만년에 공부원외랑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기도 한다.

두보는 당 현종(玄宗)이 즉위한 해인 선천(先天) 1년(712)에 허난 성 궁 현에서 태어났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하나로 “詩聖(시성)"이라 불리는 두보가 성도에 잠시 있을 때 기거하던 곳으로 성도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평생 정치에 대한 뜻을 두었음에도 그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두보가 759년 겨울, 안사의 난(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정권찬탈을 위해 일으켰던 반란)을 피해 현종(玄宗)을 따라 촉으로 피난을 왔을 때, 친한 친구 엄무(嚴武)의 도움으로 서쪽 교외의 경치 아름다운 호숫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 수 있었다. 피난 이듬 해 봄에 초가집이 완공되자 사람들은 이곳을 성도초당(成都草堂)이라고 불렀다. 또 완화계(浣花溪) 근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완화초당이라고도 한다. 두보는 이곳에서 4년여 동안 살았는데, 이 때 지은 시중에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시는 240여 수가 넘는다. 대표적으로 복거(卜居), 춘야희우(春夜喜雨), 강촌(江村) 등의 시는 초당에서 지내던 그의 시름없는 한가로운 심경을 읽을 수 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초당은 1500년과 1811년 두 차례의 확장공사로 인해 넓이가 20ha가 조금 넘으며 경내에는 대해(大懈), 시사당(侍史堂), 공부사(工部祠), 사능초당(沙陵草堂)의 석비 등 건축과 다른 많은 문화재가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시사당과 두보의 소상(塑像)이 있고, 양쪽의 진열실에는 두보의 시집과 연구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 강촌 江村 >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長夏江村事事幽(장하강촌사사유)

 

 

自去自來梁上燕(자거자래양상연)

 

 

相親相近水中鷗(상친상근수중구)

 

 

老妻畵紙爲棋局(노처화지위기국)

 

 

稚子敲針作釣鉤(치자고침작조구)

 

 

多病所須唯藥物(다병소수유약물)

 

 

微軀此外更何求(미구차외갱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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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강 한 굽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데

 

 

 

기나긴 여름 강촌은 만사가 한가롭다

 

 

 

제비는 마음대로 처마를 들고나고

 

 

 

수중의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갈 줄 모른다.

 

 

 

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드는구나.

 

 

 

다병한 몸에 필요한 것이란 오직 약물뿐

 

 

 

미천한 이내 몸이 달리 또 무엇을 바라리오.

 

 

         

 


[2014. 09. 01배낭여행 22일의 종착점 쓰촨 성도에서~. -圓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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