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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于勒)의 발자취 / 6회 정순욱

◎ 자 료/3. 카페 글

by 최안동(圓成) 2010. 2. 2.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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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于勒)의 발자취

 

정영기
[2010-01-20 오후 2:13:00]
 
 

▲ 정영기
소년시절 학교에서 악성 우륵에 관해 배울 때, 가야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위시한 6가야라고 배웠는데, 우륵은 그냥 가야 사람이었다. 어느 가야 사람일까? 나중 어느 책은 가야의 수가 12개도 넘을 거라고도 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세력이 충돌과 부침을 거듭하는 중에, 어떤 것은 일찍 사라졌거나 이웃의 강한 가야에 예속되어 있었던 탓에, 실체가 모호한 약소 가야들이 많았을 거라는 말이었다.

우륵이 어느 곳 사람이었건, 그의 예술 활동은 가야 전역에 걸쳤을 것이다. 그런 기록이 고려 때 쓴 삼국사기에 나온다. “옛 신라의 기록에 의하면, 성열현 사람 악사 우륵이 가야국 가실왕의 명을 받아 12곡을 지었는데, 그 까닭은 각국의 방언이 달라 음악도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라는 기록이다. 각국의 노래를 새로 짓거나 기존 음곡을 표준어로 정리한다 해도, 나라마다 다른 언어관습이나 환경과 정서에 대한 사전 답사와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했을 것이다.

위에 말한 가실왕은 고령의 대가야 왕이었다. 그런데, 왜 기록은 그의 나라를 대가야라 하지 않고 그냥 ‘가야국’ 이라고 했을까? 대가야는 가야시대 후기에 가장 강력한 가야로 여러 가야국들의 상국(上國)이자 가야연맹을 대표하는 맹주였고, 나중에 대가야의 멸망은 모든 가야국들의 소멸이자 가야시대의 끝이었다. 그래서 가야 전체를 흡수 통일한 신라의 시각에서, 가야연맹은 ‘하나의 가야국’이었고, 12곡을 지을 때 각국이라 말한 여러 가야들은 ‘가야국’ 내의 지방에 해당하는 군이나 현의 이름이 주어졌을 것이다.

이제 궁금한 것은 가야의 숫자가 아니라, 위의 기록이 말하듯 우륵은 성열현 사람인데, 성열현은 오늘날의 어디일까? 여러 학자들의 연구로, 성열현이 현재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로 고증 수렴되어, 신반에서 나고 자란 필자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에 힘입어, 나는 신반에서 가까운 ‘우르리’ 라는 곳을 우륵과 유관한 장소의 하나로 연구자들의 검토를 받고자 한다. 옛날에 우륵(于勒)리던 것이 우르리로 변음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르리는 지금도 많이 불려지는 토속 지명이다. 신반에서 대구 방향 20리 안에 차례로 이어지는 감암 익구 여배 다음, 필재라는 작은 고개를 포함하는 낙동강변이며, 의령 합천 군계의 청덕면 적포리의 적포교(赤布橋) 다리 근처를 말한다.

우르리는 풍광이 좋은 곳이다. 부림면 일원에 많은 얕은 시냇물과는 달리, 이곳 강은 깊고 유장하다. 빼어난 경관은 아니지만 한 쪽 강변은 절벽 형상이며, 맑은 강심에 흐름이 잔잔하여 호면(湖面)을 연상케 한다. 어릴 적 꼬마들도 외수박을 사먹으러 이곳엘 걸어 다녔고, 지금도 동향인들이 자주 찾는데, 신반에서 가장 가까운 경승지의 하나다. 강 건너 넓은 백사장은 철새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옛 시문에서 즐겨 쓴 낙안(落雁)의 평사(平沙)는 이런 곳을 말할 것이다.

우륵은 가야금의 대가지만, 스스로 시를 짓고 곡을 붙여 노래한 시인이자 가인(歌人)이었고, 춤사위를 창안한 무용가였다. 시정(詩情)이 넘치는 젊은 우륵은 격정(激情)과 도취의 면모도 많았을 것이다. 때로는 사색에 잠긴 고적한 시인의 모습으로, 때로는 가인이나 재사들로 더불어 이곳을 찾아 자적(自適)과 선유(船遊)를 즐기며 눈에 띄는 풍류의 행적을 남겼을 것임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륵이 자주 찾는 곳, 우륵리로 불렀거나, 상국의 왕이 부를 만큼 유명인이 되었을 때, 강물을 조망하는 고처(高處)나 정자(亭子) 같은 것을 둔 탓에 우륵정(于勒亭)이 있는 곳을 우륵게, 우륵리로 부르다가 나중에 우르리로 변음되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곳 출신 고(故) 노재증씨는, 우륵에 연관 지어 말하지는 않았으나, 앞서 말한 필재 고개를 우륵재라 하였다. 이곳은 의령 합천 창녕 3개 군으로 통하는 요충지로, 조선시대 역참용 마필이 있었던 탓에 필재로도 부르지만 본래는 우륵재이고, 재 아래 동네도 우륵지, 우륵게를 거쳐 우르리로 불린다고 했었다. 강을 굽어보는 우륵재 등성이에 우륵의 자취가 있었던 건 아닐까?

현재 지명 적포(赤布)는 홍수철 강물이 붉은 베를 펼친 듯하여 생긴 이름인데, 임란 때 홍의장군 휘하 장령들이 장군의 붉은 전포(戰袍)와 같은 옷을 번갈아 입고 적을 교란한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고 했다. 노씨는 6․25 때 동아대학교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한, 당시 이곳 강촌에선 드문 지식인으로 향토사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분이었다.

우륵이 나중에 서라벌로 가서 진흥왕의 배려로 제자 육성과 신라의 극예술을 더욱 발전시키고, 충주 남한강의 산수를 벗하며 그가 탄주(彈奏)한 가야금(琴)의 선율이 여울진 곳에 탄금대란 이름을 남겼듯이, 우륵이 선유하는 편주가 늘 닿는 강변을 사람들이 손쉽게 우륵의 이름을 붙여 불러, 우르리란 이름을 남겼을 것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12곡을 짓기 전에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우륵은 여러 곳의 초빙을 받거나 스스로 연주 여행을 즐기기도 했을 것이다. 육로에 지친 우륵이 뱃길을 택한다면, 그가 손쉽게 배를 띄운 곳은 성열현 그의 집에서 가까운 이곳 우르리였을 것이다. 상류로는 가실왕의 대가야에 이르고, 하류로는 남해까지 가야 여러 지역으로 물길이 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륵재 마루에 우륵정 같은 그의 발자취가 재현되면 곧 조성될 우륵문화공원과 연결하여 의미 있는 우륵문화 답사로가 될 것이다.

편집국(urnews21@hanmail.net)

의령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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