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 머리에 떠 올리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맴도는 존재다. 그런 앵두와 오늘 아침 출근길에서 마주쳤다. 도심에 앵두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내일이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앵두를 보쌈 해 왔다. 어쩌면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는 아련한 추억을 들추어보고 싶어 그랬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앵두에 얽힌 추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앵두는 다른 어느 과일보다 달콤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앵두나무는 주로 장독대나 우물가 근처, 아니면 집 뒤 대나무 밭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불행하게도 우리 집에는 앵두나무가 없었다. 이웃집 담 너머로 빨갛게 익어가는 앵두를 보고 있노라면 우선은 따먹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여염집 색시보다 더 고혹적인 자태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그래서 ‘앵두 같은 입술‘,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란 노랫말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어라! 쓰고 보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하네. ㅋㅋ...그 뒤에 가사가 더 재미있는걸. ‘물-동이 호미자루 내사 몰라 내-던지고~’ 좌우당간에 앵두가 다른 과일처럼 커서 배가 부른 것도 아닌데 왜 그리 그 조그마한 열매에 스토커처럼 집착을 했는지...곰곰히 생각해보니 당시엔 먹을 것도 없었지만 이맘 때 쯤 나오는 열매라곤 앵두밖에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앵두는 달렸다 싶으면 금세 익어 버리는 탓에 시기를 놓치면 또 일 년을 기다려야 맛을 볼 수가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린 다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적기를 골라 서리를 감행하곤 한다. 앵두나무를 둔 주인 역시 호심탐탐 꼬마 도선생들이 앵두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앵두를 지키기도 서리하기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성공적인 서리를 위해서는 사전에 치밀하게 전략을 짜야한다. 우선 집 주위를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탐색을 한 뒤,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 서리를 하기로 한다. 그 다음에는 역할분담에 들어가는데 망보는 아이, 서리 담당, 신호방법과 도주경로, 서리 후 접선 장소 등을 정하게 된다. 서리의 원칙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들키면 안 잡히고 사정없이 토낀다’, ‘혹시 누구 하나가 잡혀도 공범을 절대 밝히지 않는다‘ 뭐 이런 것들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맨 나중 원칙은 거의 지켜지지가 않는다. 이런 원칙들을 내세우는 건 잡히거나 신분이 드러나는 날엔 크게 낭패를 보기 때문이다. 암튼 간에 드디어 작전개시다. 신호와 함께 일당들은 각개전투라도 하듯 전광석화 같이 앵두나무를 향에 돌진한다. 모든 서리가 다 그렇듯 앵두 역시 점잖게 여유부리며 잘 익은 것만 골라 딸 수가 없다. 그냥 손아귀에 가지가 잡히는 대로 위에서 아래로 단번에 좌~악 훑어내려 주머니와 란닝구에 마구 집어넣는다. 짧은 시간에 임무를 완수하려면 그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때 훑어 내리면서 터진 앵두가 주머니나 난닝구를 빨갛게 물들이는 건 당연지사. 어머니께 혼날게 뻔하지만 신경 쓸 계제가 아니다. 가슴 벌렁거리는 그 순간에도 어떤 녀석은 앵두 몇 알을 허겁지겁 입에 털어 넣기도 한다. 낮은 숨소리와 눈동자 굴리는 소리가 나고 가슴은 연신 방망이질 을 해 댄다. 스스로 낸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워낙이 착하고(ㅎㅎ...)간이 작은 내가 ‘야, 고마 가자’ 라고 재촉해 보지만 욕심 많은 나쁜 녀석들은 들은 척도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지나친 욕심이 꼭 화를 부른다...‘이놈의 자슥들 거 누고’, 우려하던 대로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약속대로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죽어라 뛰어보지만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지 제자리걸음이고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서리한 앵두의 반은 흘려버린다. 가까스로 접선 장소에서 만나서는 ‘니 때문에 들켰다 아이가 자슥아’ ‘내가 뭐 우쨌는데...’ ‘내가 그만하고 나가자 안 쿠더나. 그때 나왔으면 안 들켰지’ ‘그나저나 주인이 우리 얼굴 알아봤으면 큰일인데...’ 이러쿵저러쿵 제법 실랑이를 벌이다 ‘에잇 못 알아봤을 끼다.’라고 하면서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 서리한 앵두를 꺼내 현란한 혀 놀림으로 살에서 씨를 분리해 내며 맛있게 먹어댄다. 햐! 세상에 또 이런 맛이 어디에 있을까! 하늘 한번 쳐다보고 앵두 한 알 입에 넣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앵두 한 알 입에 넣고, 이러기를 수차례. 어느새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일당들은 붉은 입술을 쓰~윽 닦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를 털고 집으로 향하지만 깔리는 회색빛 땅거미만큼이나 그들의 얼굴에도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아니나 다를까 살팍 안에 들어서니 집안분위가 이상하리만큼 냉냉하다. 이거 심상찮은데...그야말로 폭풍전야라고나 할까. 그렇다. 어케 알았는지 앵두나무 주인이 다녀간 것이다. 하도 서리를 많이 하고 들킨 경험이 많은지라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이집 아들이 우리 앵두 다 따갔는데 우짤랍니꺼? 물어 내이소. 자식교육을 어쩌고 저쩌고..’, ‘아이고 죄송합니더. 이놈의 자슥 들오기만 해봐라...다시는 안 그러도록 하겠심더’ 이런 내용들이었을 게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느닷없는 상황을 맞이한 부모님이 가만히 계실 리가 없잖은가! 아궁이에 불을 때시던 어머님이 나를 보자마자 부지깽이를 들고는 냅다 호통을 치신다. 이놈의 자식 니 오늘 낮에 무슨짓 했노. 내가 도둑질 하라고 시키더나. 부모 우사 다 시키고, 집에 들어오지도 마라. 동네 창피해서 못살겠다. 난 안 맞으려고 계속 도망 다니다가도 어머님 화를 더 돋구게 될까봐 엉덩이라도 몇 대 맞아드리면서 아프다고 엄살도 피워보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어도 보지만 어머니는 쉬 화를 풀지 않으신다. 그러고도 한참 지난 후에야 어머님은 밥상 차려주시는 것으로 화를 내려놓으신다. 훌쩍거리는 아들이 안쓰러워 보였던지 거친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시며 ’배고푸제?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하신다. 그 말씀에 서러움과 미안함이 뒤섞여 울컥하여 넘어 가던 밥은 목에 걸리고 그쳤던 눈물이 또다시 쏟아져 내린다. 다음날 주인을 찾아가 용서를 빌면서 앵두서리 사건은 막을 내리게 된다. 글을 쓰는 이 순간, 자라면서 무던히도 어머님 속을 많이 썩혀드렸고, 살아생전에 못해 드린 것이 너무 많아 죄스러움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고달프고 어려웠지만 아주 작은 앵두 하나로 큰 추억을 쌓을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부지깽이로 혼내시던 어머님이 보고 싶고, 뉘냐고 고함치시던 앵두나무 주인도 그립고, 언제나 함께였던 친구들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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