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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떡 신사의 유래... / 2회 김형수

◎ 자 료/3. 카페 글

by 최안동(圓成) 2012. 3. 15.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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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기수) 김형수(2)
제목 빈대떡 신사의 유래...
 ...돈 없으면 집에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원로가수 고 한복남 선생이 작사/작곡하고 직접 노래한
"빈대떡 신사"의 구절이다.
어쩌다 노래방에서 지인이 부르게 되면 나도 모르게 흥얼거린다.
 
이 신사는 구한말 또는 일제초기 어느 시골 부잣집의 외아들이었을 것이다.
부모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지만 어느 부잣집 도련님과 달리 품성은
착했던 것 같다.
 
일찍이 경성에 유학하여 배제고보를 다니며 서양의 기독교 문화와
일본의 새 문물을 접했고, 고보재학 중 부모의 강권으로 한번도 본적이 없는
시골처녀와 결혼했으나 신혼의 즐거움 보다 친구들과 휘황찬란한 경성의
밤거리가 눈에 아련거렸을 것이다.
 
고보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가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자 그는 졸지에
많은 식솔을 거느리는 부잣집 호주가 됐을 것이다..
처음 한해는 소작민들의 힘으로 농사일을 좀 건사하게 해 봤지만
가끔 경성을 다녀올 때마다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을 것이다.
생각과 고민끝에 드디어 전답 일부를 팔아 친구와 함께 광산업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광산은 제대로 되지 않아 시골땅은 야금야금 팔 수 밖에 없었다.
 
교제를 한답시고 총독부 관리들과 주야청청 기생집을 드나들나 보니
사업은 점차 뒷전이였다. 그렇게 몇해가 지나다 보니 광산 채굴권은
어느새 동업자였던 친구의 손에 가 있었고.
신사에게는 남은것은 만리재 넘어 세칸짜리 오두막과 쌀겨를 갈아먹는 아내
그리고 올망졸망한 5남매가 전부였다. 어느날  딱히 할일도 없고
용무는 없었지만 모처럼 경성을 향했다.
무심코 경성거리를 걷다보니 전에 자주 주드나들던 기생집이 눈에 들어온다.
 
한숨을  푹 쉬고는 그냥 지나치려는데 문득  한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이집에서 교제술을 날린 논이 몇마지기인데 그것을 생각하면
이년들이 술한상은 주겠지"하고 헛기침 흥과 동시에 들어가자 기생들은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지 호들갑을 떨며 버섯발로 뛰어나온다.
요리한상을 시키고 회포를 푼 뒤 거나한 기분으로 "술값은 외상"하니
지금까지 입속의 혀처럼 아양을 떨던 기생년들의 눈초리가 달라진다.
 
사업은 들어먹었지만 부잣집은 망해도 3년을 간다는데
이 신사는 불알 두쪽뿐인 것이다. 술값은 갚을 길이 없어 매만 맞았는데
기생들은 처량히 대문밖으로 쫒겨나는 이 신사의 뒤에다 화풀이를 한다.
"에이! 재수없어, 돈 없으면 집에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지, 기생집은 왜 와..."

그날 저녁 만리재를 넘어 집으로 돌아온 이 신사는 기생들의 악다구니대로 
빈대떡을 부쳐 먹었을까??..
 조선시대에 귀한 전통 빈대떡이라면 이 신사는 부쳐 먹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빈대떡은 녹두를 맺돌에 갈아 전병처럼 부쳐만들지만
1670년 안동장씨가 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서인 "규곤시의방"이나 1809년 빙허각 이씨가 지은 살림살이에 관한 책 "규합총서"를 보면
빈대떡은 녹두를 가루내어 되작하게 반죽해서 빈철의 기름이 뜨거워지면
조금씩 떠놓고 익힌 것인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김치와 파전이 막걸리의 최고 안주로 애용한다.
 
ps : 동문님 요즈음 막걸리가 최고가 아닌가요??
      3.1절인데 만세소리는 외치지 못하더라도
      주변 존 분들과 "원쌋"을 외치며 탁발그릇 머리위에
      올리고 김치/파전 한 입 가득히 채우는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면서 삽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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