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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림시정부

◎ 행복한 삶/2. 여행-해외

by 최안동(圓成) 2010. 9. 15.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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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 임시정부 중의 하나였다.

1919년 9월 11일에 통합하여 발족한 통합임시정부는 명목상 한성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승계하였지만 임시정부의 인적, 물적 구성은 상해 임시정부 체제로 유지되었다고 한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3층으로 된 벽돌집으로 1926년부터 1932년 직후까지 7년간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했던 곳으로 총 1,700m2 의 면적에 전시품 468건. 문물자료 150건이 보존 전시되고 있으며, 1992년 8월 한중수교가 되면서 수교당시 한국 정부가 중국에 복원을 강력히 요구하여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지금의 형태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구조는 1층 회의실, 2층 집무실, 3층 숙소와 전시관으로 사용되며, 찾아오는 사람의 대부분은 한국 사람이며 전시관에는 임시정부 당시의 여러 가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1층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단체로 촬영한 사진이 걸려있고,

2층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사진과 당시의 집무실 모습을 재현해 놓아 망명 임시정부의 초라한 모습과 궁핍한 생활상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3층 전시관에 있는 모형도 단면 전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찾는 한국 관광객의 일부 사람들은 볼거리가 너무 빈약하다는 불만을 토로한다고 하지마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애국지사와 열사들의 생생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방문한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으므로 기회가 된다면 꼭 방문하여 울~민족의 애국심과 자긍심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윤봉길 의사

호는 매헌(梅軒), 본관은 파평으로 충남 예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6세 때부터 큰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918년에 덕산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식민지 교육을 시작하자 이에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며 자퇴한 후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1931년에 상하이에서 한인애국단을 이끌던 김구를 찾아가서 1932년 4월 26일에는 한인애국단에 정식 가입하였다. 그리고 일본 국왕의 생일인 1932년 4월 29일에 홍커우 공원에서 거행하는 전승 축하식장 행사가 있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하자, 윤봉길의사는 김구선생께 독립 거사를 맡겨 달라고 부탁하여 독립 거사를 맡게 되었다. 4월 29일에 윤봉길은 폭탄이 장치된 도시락과 물통을 가지고 상엄한 경비를 뚫고 축하식장에 미리 들어가 행사가 시작되자 단상 정면에 폭탄을 던져서 일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라 대장, 상하이 거류민단 겸 행정 위원장인 가와바타 데이지를 즉사시키고, 제3함대 사령과 노무라 기치사브로 중장, 제9사단장 우 에다 겐키치 중장,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시게미스 마모루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리고 윤봉길은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오사카로 압송되어 그해 6월 21일 군법 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19일에 총살당하셨다.

윤봉길의사의 거사를 계기로 침체에 빠졌던 독립운동은 사기를 얻었고, 세계의 열강에 조선독립을 상기하게 하였으며 독립운동 단체들이 중국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장제석(蔣介石)는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냈다' 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윤봉길 의거를 주도한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위가 더욱 높아졌으며, 윤의사의 유해는 1946년에 옮겨져 효창 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구선생이 독립 후 조국에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중에 하나가 윤봉길 의사 가족을 찾아뵙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매헌 윤봉길(윤봉길 의사 어록중에서~~~)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 하였다.

우리 청년 시대에는 부모 사랑보다도 형제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계례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강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골목길 우측 청사 전경]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글!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의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고 너희에게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라며 두 아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역사공부를 하고 왔습니다.

이제라도 배울 수 있으니 참 좋습니다.

 

 

[2010. 09. 09. 방문기념 전경 / 圓成]

[상하이 예원에서 나그네의 고등학교 동무 김종원(가운데), 김진우(서연건설대표)님과 동행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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