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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최씨 유래에 대하여~~~

◎ 내 삶에 대하여/2. 가족 이야기

by 최안동(圓成) 2010. 7. 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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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최참판택 전경 

 

[시조 경주최씨 유래에 대하여~~~]


최치원의 원조로 건국의 전신인 서라벌의 6촌중 돌산고허촌 촌장 소벌도리이다.

그러나 실제 시조는 최치원의 24대조 소벌도리이며 신라 말기의 대 문장가인 최치원을 주축으로 하여 선대 및 후대에서 분파 되었다고 보면 정확하다.

문헌에 의하면 최씨는 387본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거의가 지명이고 실제 시조가 분명하게 확인 된 것은 43본이다.

본관으로는 경주, 개성, 삭령, 동주, 전주이고 그 후대에서 분파되어 여러 곳의 본관이 생겨났다.


신라시대에 웅기한 최씨는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등 3인이 똑같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그 명성을 높임으로서 1대 3최가 분리 되었으며 문창후 최치원 선생은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최고의 지성이자 한문학의 조종으로 추앙받고 있었으며 고려 때에 와서는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고려사를 보면 수많은 최씨들이 역사를 수놓았으며 서기1196년 명종26년부터 1258년 고종45년까지 60여년간 군벌정치로 한때 최씨왕국을 방불케 하였다.

충절의 명장 최영장군을 비롯하여 동양철학의 창시자 최제우 등과 신문학 운동가이자 국학의 개척자 최남선 면안 최익현선생과 같은 많은 이들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국가에 공헌했다.


경주시 교동에 자리한 최부자집은 12대 만석과 10대 진사로 문공부가 1969년 신라의 집으로 선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경주 최씨는 우리나라 최씨의 대종으로 신라 서라벌촌장 소벌도리를 원조로 하고 그의 24세손 고운, 해운 최치원을 중시조로 하여 본관을 경주에 삼아 세손을 이어오고 있으며 문창후 최치원은 12살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학문에 열중 하였으며 874년 경문왕14년 나이 18세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서기884년(현강왕 10년) 나이 28세때 귀국하여 885년 현강왕 11년 신라에 돌아와 한림학사 수병부시랑지서화감 등 여러 가지 벼슬을 받았으나 조정의 기강이 어지러움으로 외직을 자청하였다.

그리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산림강변을 거닐면서 정자를 짓고 송죽을 벗 삼아 풍월에 심취하였다. 그 후 896년 진성왕 10년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는데 그때나이 39세였다.


화숙공파 현우는 고운의 8세손 애의 아들로 고려 문화시중(영의정벼슬)을 역임을 했으며 현우의 5세손 형손은 공신으로 월은군에 봉해졌다.

무과 출신의 한홍은 형손의 아들로 중종반정때 정국공신 2등에 책봉되고 6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으며 계림군으로 봉해졌다.

면암 최익현은 화서 이한로의 수제자로서 1885년 철종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당령으로 대원군에게 경복궁 중수의 중지 당백전폐지 등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 것을 비롯하여 대원군의 실정을 탄핵하다가 제주도에 귀양 갔다.

그 후 특사로 풀러나서 1894년 고종31년 갑오경장을 시작으로 단발령이 내리자 내 머리를 자를 수 있어도 내 머리카락은 못 자른다 하여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 그를 구하기 위하여 의정부 찬정 경기도관찰사 등 여러 가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1905년 광무9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제자 임병기, 유준근 등과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 되었으나 그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밥을 먹고 살수 없다고 하여 끝내 굶어 죽었는데 그의 사체가 부산 포구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통곡하였다 한다.

 

 

남강(전지미) 전경

[석천 최씨 유래에 대하여~~~]


석천 최씨는 지금으로부터 290여년전 시조 최치원선생의 21세손 진사 최균공의 24세손 봉래공의 증조부가 서기1623년 인조반정시 남인몰락으로 인하여 밀양 청내동으로 남하하여 정착하였다.


그 후 70여년간의 세월이 흘려왔는데 그 당시 24세봉래공 생자 태성공은 밀양에서 영남유학의 도산서원(안동)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유일무이한 밀양루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서울에 상경, 과거에 급제하여 정2품 가선대부중참판이 되었다.

마침 이때는 이조 숙종19대왕 이였는데 태성공은 경기도 고양군 구덕면 내동에 기거중 숙종20년 서기1694년에 장희빈사건으로 말미암아 남인이 몰락하여 부득이 남쪽으로 피하여 내려왔다.

(MBC 사극 동이 : 장희빈사건)


고향 밀양 청내 귀산에서 70여년간의 생활을 청산하고 경남 사천 곤명면 금성촌을 향하였으나 또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다시 마산 옆 진동쪽으로 이거하여 기년 기거하다가 또 불안하여 서기1700년경에는 아예 인적이 없고 소식마저 완전 단절하기 위하여 첩첩산골인 지금의 석천 땅을 밟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이조 중엽기에는 사색당파싸움이 격렬하여 한편이 무너지면 3대가 멸하던 시대라서 부득이한 일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24세 봉래공은 생자 4형제가 있었는데 장자 태성공과 차자 태정공 그리고 4자 태징공을 동반하여 석천 이입당시 3자 태주공만이 진동 땅에 남겨두고 들어온 것 같은데 아직도 4자 태징공은 사천 곤명땅에 남아 있었는지 석천까지 동행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지금 반석골 봉래산 간자의 상석 문에 의하면 자식은 불구하고 손자까지 별세한 연후에 증손들이 회합하여 석천 이입 90년 후인 을유10월 서기1789년 정조13년에서야 상석이 건립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전이 되는데 그로부터 10년 뒤 을미 10월20일 서기1799년 정조23년에 태성공 묘전에도 상석이 건립되었다.

태성공 부부 묘는 상하로 배치되어 있는데 생자 덕룡공 묘는 시신이 누워있는  오른쪽에 있어 이상하게 보이고 차자 덕신의 묘는 각골에 남아있다.

다리골에 있는 태성공 부부와 장자 덕룡공 묘 상석은 동일자에 설립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석천에 이입한 태성공 동생 분은 전부가 후손이 없고 태성공만이 형제의 자식을 생산하여 덕룡공과 덕신공 형제로부터 자손이 내려온 것이 오늘의 경주최씨(석천최씨) 후예들이다.

현재로는 벌써 24세로부터 34세가 출생하였으나 10대가 석천을 지킨 샘이다.


그간의 세월도 290여년이나 흘렸으며 원래 석천에 인가가 생긴 것은 약 500년 정도로 추정 되는데 박씨, 강씨, 오씨 등이 먼저 이입한 모양이며 시초에는 안골 광지에서 살다가 차차 상동 중동을 경유하여 지금은 웃담, 가운데담, 선담, 문정골까지 이주하게 되었다.

시초에는 목탄 등을 꾸어서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부농가가 되어서 많은 자손들이 전국에 분포되어 있을 정도이다.

 

조상님 명절제사 준비하면서(울~아버님)


[울~ 조상님 계보?]


30세 흥조(증조할아버지)

울~ 증조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때 별세 하셨고 당시의 기억으로 수많은 문객들이 찾아와 문상을 하는 모습을 기억하며,

발인 날에는 문객분들에게 드릴 나무도시락을 지게에 지고 산으로 가는 모습과 산에서 처음으로 먹어보는 도시락이 너무 맛있어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슬픔보다는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증조할아버님 죄송합니다)

울~ 작은할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후손들이 모두 96명에 이른다는 말씀으로 보아 울~ 집안에도 많은 자손들이 배출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31세손 상만(할아버지)

32세손 명규(아버지) 울~ 아버님과 어머님은 올해 82세입니다.(자손 : 4남 2여를 둠)

33세손 금평(나)

34세손 희연(딸),준혁(아들)

 

 상정에서 석천으로 진입하는 초입 전경

 

    

  

  2010. 07. 07 -圓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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