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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심씨(靑松沈氏) 시조(始祖) 산소를 찾아서~~~

◎ 행복한 삶/1. 여행-국내

by 최안동(圓成) 2010. 3. 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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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심씨(靑松沈氏) 시조(始祖) 산소를 찾아서~~~


일상생활에서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처음으로 명함을 주고받거나 통성명을 한다.

혹여 성씨가 같으면 기분도 좋고 본관도 물어보며 서로가 우호적인 관계에서부터 대화가 시작되는 우리들의 유교적 삶을 보여준다.

특히 안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혈족중심의 한 단면입니다.

즉 후손으로써 조상을 알고 뿌리를 찾아 여행을 다니는 것은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를 배우는 좋은 일이기에 오늘도 내가 좋아하는 봄비를 맞어면서 청송으로 떠나봅니다.

                    청 송(靑 松)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주왕영산의 푸른 솔아

어제도, 오늘도 너는 변함이 없구나.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독야청청이로구나.

세월이 지나고 흘려 인간 세상에서 잡초처럼 살아가는

나그네의 육신은 이토록 외롭고 힘겨워 하거늘~~~

너는 어찌 이렇게 긴~세월 청정함과 신선함을 고이도 간직하고 있다 말인고!

               [주왕영산의 루른솔 전경] 

[청송(靑松)에는 이른 곳이 있다]

 

○ 기암괴석 사이 물 맑고 산 깊은 주왕산의 풍광

○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주산지

○ 물이 좋아 위장병, 피부병에 좋다는 달기약수탕

○ 청솔 솔기온천 및 옹기장 등등

○ 송소고택에서 옛 추억을 회상하며 여유로움과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곳.

                   [주산지 가을 전경]

오늘은 청송심씨(靑松沈氏) 시조(始祖) 산소와 송소고택(松韶古宅)를 다녀왔습니다.

 

울~동문님들 중에도 청송심씨집안의 후손이 많을 것이라 생각되어 각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역사를 배우고 추억을 남기고 왔습니다.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으로 위위시승을 지낸 청송심씨(靑松沈氏) 심홍부(沈洪孚) 시조(始祖) 산소는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덕동에 있으며, 안동에서 1시간이내의 거리입니다.


강물이 오른쪽으로 돌아 흐르고 술룡신좌이며 묘전에 작은 비석이 있으니 다만 고려조의 문림랑위위시승 심홍부(高麗朝 文林郞衛尉寺丞 沈洪孚)의 묘라 씌여 있다.


물이 흘러나오는 곳에는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모양이 연꽃이 물위로 솟아있는 것 같아 장쾌하고 기묘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


바위모양이 기이하고 험준하더니 장사지내던 전날 저녁에 갑자기 뇌성벽력이 일어나 산을 치면서 험한 돌을 부수고 옥순이 솟아 나온 것 같으니 완연히 연꽃의 모양이라 고을사람들이 현비암이라 하였으니 대개 지가서(地家書)에서 말하는 왕비가 탄생할 경조라는 것이다.

                        [비문 전경]

큰 냇물이 외청룡을 따라 현비암을 둘러싸고 서쪽으로 흘러내려 활의 모양을 이루었다.


소헌(昭憲) 인순(仁順) 두 왕후가 연달아 중사를 보내어 온 산에 잣나무를 심게 하고 청송부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여 만산이 울창하여졌으며 몇 결의 위토를 장만해 주고 청송부에 병속시켜 호장이 관리하였으며 사시(四時:正朝,寒食,端午,秋夕)에 시향을 봉행케 하였다.


풍수학(風水學)에 대해서는 풍자도 모르지만 이곳 시조 산소에서 내려다보는 푸른 숲속의 청정함, 주왕영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듯 포근하게 안긴 듯이 햇빛을 온종일 받고 있는 모습이라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을 법 합니다.

 

                    

산소 주변의 푸른솔 전경

2008년 4월 보광산 산행에 왔다가 우연한 기회에 청송심씨 시향제를 산기슭에서 보게 되어 오늘도 나그네의 발걸음은 푸른 숲이 우거진 청청주왕영산을 바라보려 이곳에 왔습니다. 

 

큰 도로에는 입석이 설치되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승용차로 5분정도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보광사라는 아담한 절이 있습니다. 물 공양도 하고 보시도 하면서 명상에서 잠시나마 삶의 짐을 놓아 보십시오. 

 

[국도변 입석 전경] 

                                               

           [만세루 입간판 전경]                                                                              [찬경루 전경] 

보광사와 마주보고 있는 만세루는 문화재자료로 보전하고 있으며, 만세루를 지나 5분정도 걸어서 올라가면 청송심씨(靑松沈氏) 심홍부(沈洪孚) 시조(始祖) 산소가 있습니다.

묘 앞에는 만세루(비가오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냄)와 읍내 남쪽에 찬경루(문화재)가 있으며, 찬경루는 객사(여각)로서 역할과 큰물이 생겨 도량을 건너지 못하게 되면 찬경루상에서 망제(望祭)를 지냈다고 합니다.


발길을 청송심씨(靑松沈氏) 청송회관으로 옮겨 선대의 업적과 후손들의 행적에 대하여 청송심씨대종회 문화이사 심재열님으로부터 많은 이야기와 자료들을 볼 수가 있업답니다.


청송심씨(靑松沈氏)의 본관은 심홍부(沈洪孚)의 증손 덕부(德符)가 우왕 때 문하찬성사에 이르러 청성부원군에 봉해졌다가 청성군충의백에 진봉되어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덕부(德符)는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청성백에 봉해졌으며 판문하부사와 영삼사사를 거쳐 1399년(정종1)에 좌정승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원부(元符)는 고려말에 여러 관직을 거쳐 전리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으며,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다고 한다.

 

                   

                    


시조의 증손인 심덕부(德符), 심원부(元符) 형제에서 크게 두 파로 갈린다.

이성계의 역성혁명 후 좌의정을 지낸 형 덕부의 후손은 대대로 서울에서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동생 원부의 자손들은 새 왕조의 벼슬을 마다하고 현재 경북 청송군을 비롯해 영남 일대에 퍼져 살았으며, 영남일대의 심씨들은 거의 원부의 후손들이라 한다.


일찍이 조선개국을 시작으로 명문벌족의 지위를 굳혀온 청송심씨는 덕부의 아들 7형제 대(代)에서 가세가 크게 융성하여 가장 화려한 인맥을 이루었다. 세종의 장인이면서도 상왕인 태종의 비위에 거슬려 끝내 왕명으로 죽음을 당했던 온(溫)은 청성백 덕부의 다섯째 아들이다.

온(溫)의 장녀는 태종의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과 가례를 올렸으며, 세종이 즉위하자 중전(昭憲王后)이 되었다.


온(溫)의 아우 종(淙)이 태조의 부마로 청원군에 봉해졌고, 온(溫)의 둘째 아들 회(澮)는 세조 때 영의정을 역임하여 3대[4세 덕부(德符), 5세 온(溫), 6세 회(澮)] 영상의 영예를 누렸다.


회(澮)의 아들 3형제 중 막내 원(湲 : 내자시 판관 역임)의 아들 순문(順門)은 장령으로 연산군의 어의에 대하여 크기를 논한 것이 화근이 되어 갑자사화 때 개령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옥사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하기도 한다.


부사 종침(宗?)의 손자이자 설의 아들로 효종조(孝宗朝)의 영상이던 지원(之源)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아들 익현(益顯)과 함께 필명을 떨쳤으며, 지원의 증손 사정(師正)은 산수화에 새로운 화풍을 이루어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저명했다.


영조 때 영의정으로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 달력을 만드는 신법을 연구해 오게 했던 수현(壽賢 : 응교 유(濡)의 아들)의 아들 육(찬선을 지냄)은 효자로 이름을 떨쳤다.


선조 때 별시문과에 급제했던 달원(達源)의 손자 우승(友勝)은 호조참판에 올라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사의 행패를 다스리다가 무고를 당했고, 그 후 한성부 우윤을 거쳐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호성이등공신으로 청계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흥원(興源)의 손자 우신(友信)은 임진왜란 때 가재를 팔아 수천명의 의병을 일으켜 창의사 김천일(안동 의성김씨 종손임)과 진주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순절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일등공신으로 청원부원군에 봉해졌던 기원(器遠)은 좌의정을 역임하였으나 인조 22년에 회은군 사건에 연루되어 피화되었다.


정조 때 좌의정에 오른 환지(煥之 : 교리 태현(泰賢)의 손자. 진(鎭)의 아들)도 명성을 떨쳤으며, 예조참판 염조(念祖)의 아들 상규(象奎)는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당대의 제 1인자로 손꼽혔다.


그 밖의 수많은 후손들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배슬을 했다는 자료를 모두 옮길 수는 없어 이것으로 줄이고 구한말 철종 때 한성부판윤과 대사헌과 예조판서를 지낸 경택(敬澤), 형조판서 의면(宜冕), 공조판서를 지낸 후 기로소에 들어간 의원(宜元), 고종 때 영의정에 올라 청ㆍ일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국의 갖가지 어려운 정치적 고비를 겪었던 순택(舜澤), 예조판서 이택(履澤), 협판교섭통상사무 상학(相學)이 유명했으며, 상훈(相熏)은 협판내무부사와 이조판서를 거쳐 선혜청당상을 역임하였고, 농촌문학의 선구자인 심훈(熏 : 본명 대섭, 상록수 저자)과 함께 명문 청송심씨를 더욱 빛낸 인물들입니다.

 

청송심씨(靑松沈氏) 심홍부(沈洪孚) 시조(始祖) 산소 전경

비오는 날 청송심씨 청송회관에서 커피한잔 마시고 청송심씨 시조와 후손들에 대한 업적과 자료들을 살펴보는 순간 대단한 명문가의 집안임을 새삼 느끼면서 송소고택으로 이동합니다.

                   송소고택(松韶古宅)

청송에서 좀 더 여유가 있으면 장작불로 달궈진 온돌방에 누워 허리를 지지고, 새벽이면 닭 울음소리에 단잠이 깨는 송소고택에서 하룻밤을 체험해 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라 생각되어 사진과 함께 올려봅니다.

TV도 없고 컴퓨터도 없어 약간의 불편이 뒤따르겠지만 온가족들이 하룻밤을 옛 조상들의 정취를 느끼면서 고즈넉하고 깊은 추억을 의미하는 여유로운 삶을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 파천면 지경리(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로 이거하면서 건축한 가옥으로 ‘송소세장(松韶世莊)’이란 현판을 달고 9대간 만석부를 지낸 건물이다.

 

특히 눈여겨 볼것은 정다운 굴뚝과 장독대 민가양식으로 건물에 독립된 마당과 사랑공간, 생활공간, 작업공간으로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등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특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바깥마당에 담장으로 구획한 내ㆍ외 담과 대가족제도하에서 4대 이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는 별묘 등 민속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기에 시간이 허락되면 한번쯤 추억여행을 떠나보심이 어떻겠는지요.


청송심씨 본가에 대한 자료가 방대하여 많이 줄였습니다. 깊이 있는 학문을 연구한 분야가 아니기에 나그네의 눈과 귀로 들은 일부만 옮겼습니다. 이해하여 주세요.

청송심씨의 후한 인심에 감사함을 전하면서 귀향길에 청송심씨 중시조 묘소가 별도로 있다고 하여 찾아 갔으나 비가 오는 관계로 산에는 오르지 못하고 선산입구에 조성되어 있는 만지송을 바라보면 사진도 한 장 찍고 왔습니다.

(만지송 : 수령 800년 추정, 줄기와 가지가 만가지라하여 만지송)

 

 [ 2010.  03.  03.   -圓  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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