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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구들과 안동에서

◎ 행복한 삶/1. 여행-국내

by 최안동(圓成) 2009. 11. 1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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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구!

 

오늘은 고향에 있는 친구들이 가족들과 먼~곳까지 찾아와 주어 정말 행복한 시간이랍니다.

부족함이 많은 내가 안동이란 이런 곳에서 살고 있노라고 애기하면서 이곳저곳 다녀봅니다.

 

                                                                     군자리 전경

이곳은 조선조(朝鮮朝) 초기(初期)부터 광산 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가 약 21대에 걸쳐 600년간 세거(世居)해 오던 외내[烏川] 마을이 안동댐으로 인하여 수몰되자 문중의 건물(建物)들을 한곳으로 이건한<군자리>로 오천 문화재단지(文化財團地)입니다. 친구들이랑 청량산 가는 도중에~~~ 

나의 고향 친구들이기에 저랑 취미나 생각이 비슷한 친구들입니다.

먹는 음식도, 듣는 음악도 비슷한 친구들입니다.

(저녁에 청량산에서 먹었던 반찬이 옛~날 어릴적에 먹었던 음식 이였고 행복이였습니다)   

 

                                                 도산서원 시사단(試士壇)을 보고나서 찰깍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이라 꿈도 같은 친구랍니다.

나의 모든 것을 응원 해주고 늘 격려 해주는 친구들입니다.

잘못이 있으면 서로 덮어주는 고마운 친구들이기에 우린 행복했습니다.

 

                    

 

도산서원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학자이신 퇴계 이황(李滉)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세운 서원(사적 제170호)으로, 1574년(선조 7) 지방유림의 발의로 도산서당의 뒤편에 선생을 추모하고,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기 위해 도산서원을 건립하였으며, 이황의 위패를 모셨다.

 

  도산서원 전교당 (典敎堂)

 

전교당은 유생들의 자기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는 강당으로서, 전교당의 앞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이 전교당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지은 것을 1969년에 보수한 것이며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이고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1575년 선조 임금께서 한석봉 친필인 "도산서원"의 현판을 하사 하시어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도산서당(陶山書堂)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거처하시던 방은 "완락재"라 하였고, 마루는 "암서헌"이라 하였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당(陶山書堂), 서실(書室), 강당인 전교당, 이황과 제자 조목(趙穆)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사당인 상덕사(尙德祠:보물 제211호)로 나뉜다.

대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전교당이 있고, 안마당에는 동재인 홍의재(弘毅齋)와 서재인 박약재(博約齋)가 대칭으로 자리잡고 있다.  

 

                  

 

도산서당 앞의 금송

도산서원은 영남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退溪先生이 "며느리" 改嫁시킨 이야기 하나~더!


퇴계선생의 맏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한창 젊은 나이의 맏며느리는 자식도 없는 과부가 되었다.

퇴계 선생은 홀로된 며느리가 걱정이었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며느리가 어떻게 긴 세월을 홀로 보낼까?

그리고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집이나 사돈집 모두에게 누(累)가 될 것이기에, 한밤중이 되면 자다가도 일어나 집안을 순찰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밤 집안을 둘러보던 퇴계선생은 며느리의 방으로부터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순간 퇴계 선생은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점잖은 선비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며느리의 방을 엿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며느리가 술상을 차려 놓고 짚으로 만든 선비 모양의 인형과 마주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형은 바로 남편의 모습이었다.

인형 앞에 잔에 술을 가득 채운 며느리는 말했습니다.

“여보 한 잔 잡수세요."

그리고는 인형을 향해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남편 인형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는 며느리......

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흐느끼는 며느리........

퇴계 선생은 생각했습니다.

윤리는 무엇이고 도덕은 무엇이냐?

젊은 저 아이를 수절시켜야 하다니.........

저 아이를 윤리 도덕의 관습으로 묶어 수절시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다, 인간의 고통을 몰라주는 이 짓이야말로 윤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여기에 인간이 구속되어서는 안된다.

저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이튿날 퇴계 선생은 사돈을 불러 결론만 말했습니다.

"자네, 딸을 데려가게."

"내 딸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잘못한 것 없네. 무조건 데려가게."

친구이면서 사돈관계였던 두 사람이기에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딸을 데리고 가면 두 사람의 친구 사이마저 절연하는 것이기 때문에 퇴계선생의 사돈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안되네. 양반 가문에서 이 무슨 일인가?"

"나는 할 말이 없네. 자네 딸이 내 며느리로서는 참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이지만 어쩔 수 없네. 데리고 가게."

이렇게 퇴계선생은 사돈과 절연하고 며느리를 보냈습니다.

몇 년 후 퇴계선생은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날이 저물기 시작했으므로 한 집을 택하여 하룻밤을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저녁상을 받아보니 반찬 하나하나가 퇴계선생이 좋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더욱이 간까지 선생의 입맛에 딱 맞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 집 주인도 나와 입맛이 비슷한가 보다.'

이튿날 아침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찬의 종류는 어제 저녁과 달랐지만 여전히 입맛에 딱 맞는 음식들만 올라온 것입니다.

나의 식성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이토록 음식들이 입에 맞을까?

혹시 며느리가 이 집에 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퇴계선생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막 떠나가려는데 집주인이 버선 두 켤레를 가지고 와서 '한양 가시는 길에 신으시라'며 주었습니다.

신어보니 퇴계선생의 발에 꼭 맞았습니다.

아! 며느리가 이 집에 와서 사는구나.

퇴계선생은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을 보나 주인의 마음씨를 보나 내 며느리가 고생은 하지 않고 살겠구나.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짐작만 하며 대문을 나서는데 한 여인이 구석에 숨어 퇴계선생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퇴계선생은 이렇게 며느리를 개가시켰습니다.

이 일을 놓고 유가의 한 편에서는?

오늘날까지 퇴계선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선비의 법도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다. 윤리를 무시한 사람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정반대로 퇴계선생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퇴계선생이야말로 윤리와 도덕을 올바로 지킬 줄 아는 분이시다.

윤리를 깨뜨리면서가지 윤리를 지키셨다."며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까요?

이런 훌륭한 분들이 이 나라의 선구자가 아닌지요?

안동을 찾아준 친구들께 고맙고 항상 온 가족이 행복하길~~~~청량산 애기는 다음에? 

 

 

 09. 11. 10 -圓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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