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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 내앞(川前) 종택을 찾아서......

◎ 행복한 삶/1. 여행-국내

by 최안동(圓成) 2009. 5. 1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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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 내앞(川前) 종택   

 

안동에 있는 의성김씨 종택을 찾아서
원광대 사회교육원 조용헌 교수님의 “한국의 명가 명택”이란 책을 접하고 무심코 지나친 의성김씨 종택을 다시 한번 찾아봅니다. 앞으로 시간을 내어  내가 살고 있는 안동을 원으로 하여 가까운 곳부터 차근차근 돌아보면서 우리 전통의 고풍스러운 주거양식과 주변경관 등을 두루 접하면서 관련 자료들을 올려보겠습니다. 본문 내용은 조용헌교수님의 집필임을 알려드립니다. 
 

人傑地靈(인걸지령)의 명당, 선비정신의 산실 

의성김씨 종택은 권력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고발하는 기백과 목숨을 내건 의리로 인해 조선시대 금부도사가 세 번이나 체포영장을 들고 오는 수난을 겪었다. 또 비범한 인물들을 배출한 내앞 종택의 산실(産室)은 이문열의 소설 소재로 등장할 만큼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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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독립기념관 전경(종택 측면에 위치)


안동에 있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종택 위치는  중앙고속도로 안동IC에 하차하여 시내로 진입 → 동쪽으로 반변천(半邊川)을 따라 8㎞정도 지점에 국립안동대학교 → 여기서 10분정도 올라가다 보면 독립기념관이 있고, 그곳 주변을 살펴보면 고풍어린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자리잡은 풍경이 나타난다. 바로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의성김씨 집성촌이다. 

그 기와집들 가운데에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년)을 중시조로 모시는 의성김씨 내앞(川前) 종택이 있다. 내앞 종택은 조선 선비의 강렬한 정신이 어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강렬함이란 권력의 부조리를 정면에서 고발하는 직언(直言) 정신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기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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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 김진을 중시조로 모시는 의성김씨 내앞 종택 전경
 

내앞 종택은 그 기백과 의리 때문에 조선시대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직접 체포영장을 들고 찾아와 종택 뜰에 말을 매는 일대 사건을 세 번이나 겪어야 했다. 안동지역 인근에서 회자되는 "유가(儒家)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 는 속담은, 자신의 신념과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금부도사의 체포영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으로 받아들였던 조선 선비들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언제부터인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를 과도하게 명심한 나머지 자나깨나 모나지 않기 위해서 박박 기는 삶을 전부로 알고 있는 범부들의 처세 요령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차원이 다른 처세이자 정신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내앞 종택은 조선 선비의 기개가 전해오는 집이다.

 

명문 종택의 고장 

한국의 문화지도에서 안동이라는 지방을 찾아보면 ‘양반문화'라는 코드가 나타난다. 다른 지역에 비해 조선시대 양반 선비들의 문화가 현재까지도 가장 잘 보존된 지역이 안동 일대다.

특히 국학진흥원내 유교박물관이 완성되어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오는 이곳 안동.

수백년 역사를 지닌 종택들이 가장 많이 보존되고 있는 곳도 안동 일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의성김씨, 진성이씨, 안동권씨, 고성이씨, 하회류씨, 전주유씨, 재령이씨, 광산김씨 등등 명문종택 수십 군데가 안동, 봉화, 영양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오늘날 안동 일대에 유교문화 또는 양반문화가 비교적 많이 보존돼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동 내앞의 의성김씨 종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풍수가에서 지목하는 영남의 4대 길지는 경주의 양동마을(良佐洞), 풍산의 하회(河回), 임하(臨河)의 내앞, 내성(乃城)의 닭실(酉谷)을 꼽는다. 양동마을은 건축학자 김봉렬의 표현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평창동에 해당되는 고급주택지로서 손중돈과 이언적의 후손들이 사는 곳이다. 하회는 겸암과 서애로 상징되는 류씨들 동네고, 내앞은 의성김씨, 닭실은 충재의 고택으로 뜰 옆 거북바위 위에 앉아 있는 청암정(靑巖亭)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4대 길지 가운데서 양동마을을 제외한 세 군데, 즉 하회.내앞.닭실이 안동 부근에 몰려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택리지의 4대 길지 

그런가 하면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년)은 조선에서 양반선비가 살 만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로 경북 예안(禮安)의 퇴계 도산서원이 있는 도산(陶山).하회.내앞.닭실을 꼽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 풍수가에서 꼽는 영남의 4대 길지와, "택리지"에서 지목한 4대 길지 가운데 세 군데가 중복된다는 점이다. 하회.내앞.닭실이 그렇다. 이중환은 경주의 양동마을 대신 퇴계가 살던 도산을 포함시킴으로써 안동 일대 네 군데를 모두 조선의 베스트 명당으로 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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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택 앞  반변천 전경
 냇물가에서 살아가기 

‘택리지'에서 이중환이 제시한 지리, 생리, 인심, 산수라는 네 가지 조건을 이상적으로 갖춘 곳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로'계거(溪居)'다. 계거란 냇가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바닷가 옆에서 사는 해거(海居)보다는 강 옆에서 사는 강거(江居)가 낫고, 강거보다는 냇가에서 사는 계거를 더 높게 쳤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계거를 이상적인 입지조건으로 인식하였다.


의성김씨 내앞 종택은 바로 그러한 계거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내앞(川前)"이란 이름도 반변천(半邊川)이라는 냇물 앞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이 집안의 중시조인 청계(靑溪) 김진의 호에 "계(溪)"자가 들어간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런가 하면 내앞과 인근지역인 도산(陶山)에 살면서 청계와 거의 동년배였던 퇴계(退溪) 이황도 그 호에 역시 계자가 들어가 있다.

대략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까지의 시기에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명문거족의 집들이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내앞 종택은 경북 영양군에 위치한 일월산(日月山, 1219m)의 지맥(支脈)이 동남방으로 내려오다가 서쪽으로 흘러오는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과 만나면서 자리를 만든 곳이다. 반변천은 마을 앞을 휘돌아 나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모래밭을 형성하였다.


오룡지가(五龍之家)의 명문 

내앞 의성김씨들이 명문가로 알려진 계기는 중시조인 청계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면서부터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다. 일제 강점기에 촌산지순(村山智順)이 지은 "조선(朝鮮)의 풍수(風水)"에도 명택의 사례로 완사명월형에 자리잡은 오자등과택이 소개되고 있다. 다섯 아들을 오룡(五龍)에 비유해서 오룡지가(五龍之家)라 칭하기도 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보면 아들 다섯 명이 과거에 합격하면 국가가 혜택을 주었다. "아들 다섯이 과거에 오른 부모에게는 임금한테 보고하여 해마다 쌀을 보내 주었으며, 부모가 죽으면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지내준다"는 예전(禮典)의 조항이 그것이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그 다섯 아들 모두가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서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더 중요하다.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1522~1585년), 구암(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년), 운암(雲岩) 김명일(金明一, 1534~1570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1541~1591년)이 바로 그들이다. 장남인 약봉은 내앞의 대종택에서 살았지만, 나머지 네 아들은 안동 인근으로 분가하여 각기 소종택을 형성하였다. 이 소종택들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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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택의 사랑채 전경 / 안채보다는 1m정도 높게 시공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버지인 청계의 교육방법이다. 어떻게 교육했기에 아들 다섯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강직한 선비로 키울 수 있었을까? 그 교육철학은 무엇이었는가?


청계가 자신의 성취보다는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일화가 전해진다.


청계가 젊은 시절 서울 교외의 사자암에서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어떤 관상가를 만났는데 하는 말이 "살아서 참판(參判)이 되는 것보다는 증판서(贈判書)가 후일을 위해 유리할 것"이라는 충고였다. 이 말을 듣고 즉각 대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녀교육에 전념하였다는 일화가 문중에 전해진다. 청계가 자녀교육에 관하여 유별나게 관심을 기울인 특별한 아버지였다는 것은 자식들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넷째 아들 학봉이 작성한 아버지 행장에는 가슴 뭉클한 내용이 나온다.


"큰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자녀가 모두 8남매나 되었는데, 대부분 어린아이거나 강보 속에 있었다. 이에 아버지께서 온갖 고생을 다해 기르면서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한밤중에 양쪽으로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있으면 어린아이가 어미젖을 찾는데 그 소리가 아주 애처로웠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는데, 비록 젖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젖꼭지를 빨면서 울음을 그쳤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말씀하실 적마다 좌우에서 듣는 사람 중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린 새끼들이 밤에 젖을 찾으니 중년 남자인 자신의 젖을 물릴 정도로 자녀양육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 인물이 청계다. 그는 인근에 살던 퇴계에게 다섯 아들을 보내 공부시킨다. 다섯 아들은 일찍부터 퇴계의 훈도를 받은 것이다. 그중 넷째 아들인 학봉은 후일 서애 유성룡과 함께 영남학파를 이끄는 양대 기둥으로 성장한다.


청계가 자녀교육에서 강조했던 부분이 있다. 교육철학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영수옥쇄(寧須玉碎) 불의와전(不宜瓦全)"의 가르침이다.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는 가르침이다. 차라리 곧은 도리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리를 굽혀서 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도 "너희가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오히려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줄 것이고,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오히려 죽은 사람과 같이 볼 것이다(人寧直道以死 不可枉道以生 汝等爲君子而死 則吾視猶生也 爲小人而生 則吾視猶死也)"고 강조하였다.


직도(直道)를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목숨을 버리라는 가르침, 선비 집안에는 3년에 한 번씩 금부도사가 찾아올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각오, 이것이 조선조 선비정신의 정수가 아닌가 싶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회 중에 미꾸라지 회가 제일이다는 자기 보존의 남루한 처세요령을 가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요즘 세태와 비교해보면 너무나 눈부신 철학이 아닐 수 없다.


임금에 직언하는 강직한 성품 

넷째 아들인 학봉 김성일의 강직한 일화가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진다. 1573년 9월 학봉이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선조가 경연장에서 "경들은 나를 전대(前代)의 어느 임금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정언 정이주가 "요순 같은 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더니, 학봉이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임금이 "요순과 걸주가 이와 같이 비슷한가?"라고 물으니 학봉이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타고난 자품이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으시니 이것은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주상이 얼굴빛을 바꾸고 고쳐 앉았으며 경연에 있던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서애 유성룡이 나아가 아뢰기를 "두 사람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이라고 응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도 얼굴빛을 고치고 신하들에게 술을 내게 하고서 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보통 직장생활에서 윗사람이 듣기 거북한 직언을 하고 나면, 그 후유증이 최소 3년은 계속되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런데 학봉은 임금 면전에다 대놓고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직언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다"는 직언을 할 정도로 기백이 있었다. 학봉의 그 기백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는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 청계의 평소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학봉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풍신수길을 평하여 "그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워할 것 없다"라고 했던 말이 임진왜란 상황을 오판하게 했다고 하여 체포령이 내렸다. 학봉은 그 소식을 듣자 금부도사를 기다릴 것도 없이 서울로 자진출두하였다. 출두하던 도중 충청도 직산에서 경상도초유사를 임명받고 영남으로 돌아와 왜군과 싸우게 되었다.


학봉이 진주성에 도착하니 목사와 주민이 모두 달아나 성은 텅텅 비어 심난한 상황이었다. 옆에 있던 송암(松庵), 대소헌(大笑軒) 두 사람이 산하를 쳐다보고 비통해하면서 강에 빠져 죽자고 하자 공은 웃으면서 사나이가 한번 죽는 것은 어려울 바 없으나 도사(徒死)해서야 되겠느냐 하면서 이때의 비장한 심정을 시로 읊었다. 이 시가 식자층 사이에 회자되는 "촉석루중삼장사(矗石樓中三壯士)"라는 유명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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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의 유등축제 전경

"촉석루에 오른 세 사나이(矗石樓中三壯士)/ 한잔 술 마시고 웃으며 남강물 두고 맹세하네(一杯笑指長江水)/ 남강물은 넘실대며 세차게 흐르누나(長江之水流滔滔)/ 저 물결 마르지 않듯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波不渴兮魂不死)."

학봉은 이 시를 쓰고 난 후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을 이끌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 진주공관에서 과로로 죽는다. 평소 학봉을 미워하던 서인들도 그 죽음을 애석해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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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산실(인걸은 지령) 전경
 인물을 낳은 방 "산실(産室)"

풍수 좌향으로 계좌(癸坐)를 놓은 의성김씨 종택에는 "산실(産室)"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방이다. 사랑채에서 안채가 거의 겹쳐지는 지점에 있는 방이다. 이 방이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는 풍수의 대명제를 직접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성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 집의 임신부는 아이를 출산할 때 다른 방에서 낳지 않고 대부분 이 방에서 낳았다. 아이를 출산하는 방이라고 해서 산실 또는 태실(胎室)이라고도 한다.


이 방은 집 전체에서 지기(地氣)가 가장 강한 곳이기 때문에, 여기서 산모가 아이를 임신하거나 출산하면 그 정기를 받아 비범한 인물이 나온다고 의성김씨들은 믿었다. 학봉도 이 방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서 다른 아들들도 모두 여기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오룡지가의 오룡을 낳은 방도 바로 이 방이고, 그 이후로도 수백년 동안 많은 인물이 이 방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셈이다.


산실의 영험함에 관한 믿음은 내앞 종택 외에도 여기 저기서 발견된다. 경주 양동마을의 손중돈 고택에서도 3명의 인물이 배출된다는 산실이 남아 있고, 안동 신세동에 있는 고성이씨의 종택, 즉 독립운동가 이상룡(李相龍, 김대락의 손윗동서)의 고택에도 조선조에 재상 3명을 산출한 영실(靈室, 산실)이야기가 전해진다.


과연 산실이라는 게 타당성이 있는가? 산실의 영험성은 풍수에서 그 집터의 입수맥을 통해 파악한다. 사찰에 가면 지맥이 들어오는 내룡, 또는 입수맥 자리에 대개 산신각이나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어 기가 충만한 종교적 영험성을 확보할 수 있듯이 산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은 비범한 인물이 형성되는 조건이다. 산실에서만 낳으면 무조건 인물이 되고, 쓰레기장을 매립해서 지은 15층 아파트에서 낳으면 별볼일 없는 필부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지금까지 안동에 있는 의성김씨 명가 명택에 관련한 자료를 모았습니다.(참고자료:조용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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