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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고성 이씨 종택을 찾아서......

◎ 행복한 삶/1. 여행-국내

by 최안동(圓成) 2009. 3. 17.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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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고성 이씨 종택을 찾아서......

 

고택에는 집주인의 문학적 취향과 실용적인 목표가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고택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곳이 바로 고성 이씨의 종택인 임청각이다.

임청각의 11대 종손인 허주(虛舟) 이종악(1726~1773)으로 대표하는 고성 이씨 일가는 세속의 욕망을 벗고 인간의 자존을 지키며 풍류를 즐긴 선비의 전형을 보여준다. 400년 전에는 3대가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를 해 삼세유허비를 세웠고 400년 후에는 다시 3대(이상룡,이준형,이병화)가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더 정확하게는 이상동,이봉희,이승화,이형국,이운형,이광민 등을 포함해 아홉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낙동강 상류에 자리 잡은 99칸의 대저택‘임청각’ 대문 앞에는 낙동강을 오르내릴 수 있는 유람선의 접안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런 집안이 일제 강점기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만주로 향했다.

집안의 자손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바람에 그 후손들은 고아원에서 자라야만 했다. 초대 임시정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이 바로 임청각의 종손이다.

 

안동 임청각은 보물 제 182호로 지정된 주거생활공간이다.

특히 일제의 개락에 의한 중앙선 철길이 임청각 앞을 지나도록 시공되어 이 집안의 기운을 꺾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곳 임청각은 개인에게 개방하여 숙박시설로도 활용하고 있으며, 봄날의 햇살은 안동호와 임하호에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어머니의 숨결이 느껴지는 이곳,

대한민국의 혼을 내뿜는 이곳,

전통적인 기품에 서정적 선율을 간직한 이곳,

낭만의 운치와 마음의 여유와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되는 이곳입니다.

 

 

 

그리고 고성이씨 집안의 "원이 엄마" 애절한 사랑이야기(아가페)입니다.

1998년 4월 반변천 남쪽의 택지개발지구에서 고성이씨 집안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다.

무덤의 주인은 3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이 집안의 "이응태" 였다.

묘를 이장하면서 관속에 발견된 유물을 보고는 모두가 가슴 뭉클한 애절한 부부애를 세상에 공개하게 된 사연입니다.

유물 중에 한통의 편지와 삼줄기와 머리카락을 섞어 삼은 신발이었다.

아내는 병든 남편이 하루 빨리 회복되도록 자신의 머리를 잘라 정성스레 신을 삼아 놓고 천지신명에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원이 아버지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어서 나를 데려가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 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남편의 죽음을 맞으며 아내가 쓴 이 편지는

수백 년 동안 망자(亡者)와 함께 어두운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가 이장(移葬)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20년 전에 씌어진 이 편지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고스란히 전하며 심금을 울렸다.

장례 전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씌어진 편지는 죽은 남편에게 그 아내가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내는 지아비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으로 하고픈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종이가 다하자 모서리를 돌려 써 내려갔다.

모서리를 채우고도 차마 끝을 맺지 못하자 아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거꾸로 적어 나갔다.

이 편지 외에도 많은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남편의 머리맡에서 나온 유물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파악되지 않았지만 겉을 싸고 있던 한지를 찬찬히 벗겨 내자 미투리의 몸체가 드러났다.

조선시대에는 관속에 신발을 따로 넣는 경우가 드문데다

미투리를 삼은 재료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져 이 미투리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검사 결과 미투리의 재료는 머리카락으로 확인되었다.

왜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삼았는지 그 까닭은 신발을 싸고 있던 한지에서 밝혀졌다.

한지는 많이 훼손되어 글을 드문드문 읽을수 있었다.

"내 머리 버혀...(머리카락을 잘라 신을 삼았다)"

그리고 끝에는 "이 신 신어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내용들이 얼핏 얼핏 보였다.

편지를 쓸 당시 병석에 있던 남편이 다시 건강해져 이 미투리를 신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머리를 풀어 미투리를 삼았던 것이다.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죽자 그녀는 이 미투리를 남편과 함께 묻은 것이다.

임신 중이었던 아내는 아이가 태어나면 입히려했던 배냇저고리도 남편과 함께 묻었다고 하는 애절한 아가페 이야기입니다.

 

                                              아가페란 : 사랑을 뜻하는 그리스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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