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새해 달력을 보니 지나온 한 해가 묵은 세월로 빠져나
가려고 한다. 무슨 일을 하면서 또 한 해를 소모해버렸
는지 새삼스레 묻는다. 그러다가 문득 내 남은 세월의
잔고는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이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삶은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엇이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가령 꽃이나 달을 보고도 반길 줄 모르는 무디어진
감성, 저녁 노을 앞에서 지나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줄 모르는 무감각, 넋을 잃고 텔레비전 앞에서
허물어져가는 일상 등, 이런 현상이 곧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섬이다.
저물어가는 이 가을, 한 친지로부터 반가운 사연을
받았다. 지난여름 20년 가까이 살던 집에서 새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오랫동안 꿈꾸어왔던‘혼자만의 공간'
을 마련했다고 알려왔다.
언제라도 혼자일 수 있는 텅 빈 공간을···.
그 공간의 이름을 ‘도솔암’이라고 했단다.
도솔은 도솔천에서 온 말인데 그 뜻은 지족천(知足天).
그러므로 만족할 줄 알고 살면 그 자리가 곧 최상의
안락한 세계라는 뜻이다. 온갖 얽힘에서 벗어나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훨훨 날 수 있다면 그곳이
곧 도솔암의 존재의미일 것이다.
누구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 그런 소원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한 인간으로서 가정적인
의무나 사회적인 역할을 할 만큼 했으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은 세월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어차피 인간사란 앞서기 뒤서기 하면서 홀로 남게
마련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홀로 왔듯이 언젠가는
혼자서 먼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엄연한 삶에 길이고 덧없는 인생사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보다 성숙해져야 한다.
나이 들어서도 젊은 시절이나 다름없이 생활의
도구인 물건에 얽매이거나 욕심을 부린다면 그의
인생은 추하다. 어떤 물질이나 관계 속에서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삶의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에 두면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담담
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지혜와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한다.
인생의 황혼기는 묵은 가지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꽃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몸은 조금씩 이지러져
가지만 마음은 샘물처럼 차오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무가치한 일에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간에 항상 배우고 익히면서
탐구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그의 삶이 녹슨다. 깨어있고자 하는 사람은
삶의 종착역에 이를 때까지 자신을 묵혀두지 않고
거듭거듭 새롭게 일깨워야 한다. 이런 사람은
이 다음 생의 문전에 섰을 때도 당당할 것이다.
이제 나이도 들만큼 들었으니 그만 쉬라는 이웃의
권고를 듣고 디오게네스는 이와 같이 말한다.
“내가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결승점이
가까워졌다고 해서 그만 멈추어야겠는가?”
디오게네스의 이 말을 나는 요즘 화두처럼 곰곰이
되뇌고 있다. 그러다 보면 결승점만이 아니라
출발점도 저만치 보인다.
[아름다운 마무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