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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서원을 찾아서....

◎ 행복한 삶/1. 여행-국내

by 최안동(圓成) 2009. 7. 25.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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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동서원

 

                                                                                     역동서원 전졍

 

                                                                    

○ 유래 :

  - 1567 퇴계선생에 의하여 발의되어 1567년(선조 즉위년) 예안 부포 오담에 세워진 안동 최초의 서원입니다.

  - 1570 안동 지방 최초의 서원인 '역동서원'은 1570(선조3년)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우탁'선생의 학문과 덕행

     을 추모하기위하여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습니다.

  - 1684 그 후 1684년(숙종10년)에 '역동'이라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습니다.

  - 1868 그러던 중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현 위치에 복원 하였습니

     다.

  - 1981 안동대학교가 명륜동에서 송천동으로 이전하여 서원이 대학교 내에 위치하게 되자 단양우씨 문중에서

     1991년4월1일 안동대학교에 기증하여 안동대학교 부속서원이 되었습니다.

     이후 국가의 소유가 되었고 안동대학교 박물관에서 서원의 관리를 해오고 있습니다.

 

 


○ 역동(易東) 우탁(禹倬)선생 (1262-1342)

  - 역동서원에서 위패를 모시는 분입니다.

  - 본명은 '탁'이며 자(子)는 천장(天章) 또는 탁부(卓夫)이며, 호는 단암(丹巖) 또는 백운당(白雲堂)이며 세칭

     '역동(易東)'이라 부르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 입니다.

  - 선생은 강대 정직한 지조로 군을 다스림에 요망한 사당을 철거했고 조정에서는 도끼를  짊어지고 바른 말씀을

     간하였다고 합니다.

  - 고려말의 대학자이며, 총명하고 슬기로운 재질과 불의에 굴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지조를 겸비한 성품으로 고

     려원종 3년에 탄생하시어 우리나라에 도학의 문을 열었다.


※ 조선조에 들어와 역동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였던 퇴계 선생이 구택 근처에 '역동서원'을 창건 하였습니다. 그 뒤 역동의 본향인 단양에 단암서원, 최초의 사관지였던 영해의 단산서원, 그리고 안동에 구계서원 등이 창설되어 향사 하였습니다.


○ 역동의 위상

  - 학문적으로는 한국 성리학의 역사를 열어나간 선구자였고, 특히 역학의 대가로서 추앙 받습니다.

  - 관료로서 과감히 미신을 타파하고, 군왕의 패륜행위를 바로잡기 위하여 지부상소를 감행함으로써 후대 관료

     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 안동전통문화 속에서 역동은 도학, 예의, 절조를 상징하는 향토의 선현이었습니다.

  - 그로해서 퇴계와 그 문도들에 의해 존중받았고 조선조 안동선비문화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안동대학교 캠프스와  역동서원

○ 역동서원 전경

  - 역동서원은 원래 안동군 예안면 유포동 이퇴계선생에 의하여

  - 1567년에 세워진후

  - 1684년에 숙종의 양액을 받았으나

  - 1865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

  - 1969년에 안동군 임하면 송천동에 옛 규모를 본떠 복원 한것이다.


※ 역동서원에 현재 걸려있는 현판전부가 이퇴계선생의 친필이다.

역동서원은 안동대학교 캠프스내에 위치하고 현재는 민속학 전공 학생들이 민속문화에 대한 심화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음.

 


※ 현판의 의의

 동재(四勿齋) -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말하지도움직이지도 말라.

 서재(三省齋) - 증자왈 남을 도와주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만큼 도와주었는가?

 건성이 아니라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친구와의 교제에 혹 신의 없는 행동을 하지 않았는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말을 했다면 신의를 해치는 것이다.

 스승에게 배운 것을 잘 익히었는가?

 가르침을 받으면서 공부를 게을리 하면 결국 그 도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고, 잘못된 지식을 다시 제자에게 전

 하게 된다.

 

 

 

○ 우탁의 문학사적 위치나 의의

 - 아래 3편의 한시는 모두 도학적 이념과 자연합일이라는 노장풍의 시들이다.


※ 우탁이 훗날 퇴계를 위시한 사림들에 의해 깊이 받아들여지고 추앙받게 된 계기는 아마 그의 도학적 기풍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이룩하기 보단 물러나 지키고자 했던 조선조 선비들의 의식세계와 우탁의 은둔적 기질은 본질적으로 하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원류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 문학사에 농암 이현보가 이룩한 의의나 퇴계 이황의 도학적 기풍의 시들 또한 역동의 유풍을 전해 받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아래의 시는 우탁이 의정부 사인벼슬을 버리고 사인암에 머물며 주위 풍광을 노래한 시다.


단풍잎에 서리 내려 땅에 붉게 덜어지고 / 석담 위에 바람 부니 푸른 하늘 흔들리네 / 숲 사이 외로운 마을 멀리 보일락 말락 하는데 / 구름 밖에 산봉우리만 연이어 들승날승 하네.


그리고 사인암(舍人岩)에는 주역 28괘인 택풍대과(澤風大過)을 인용하여 선생의 당시 심경의 소회를 친필로 남겨놓았다.

여기서 대과(大過)란 즉, 음식을 과식한 것, 욕심이 과중한 것, 상하를 연결하는 중간에 장애물이 지나치게 강하여 의사소통이 안 되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중정을 닦아 덕을 베풀라는 말이다.


卓爾弗群(탁이불군): 탁아 너는 간사한 부류가 아니다.

確乎不拔(확호불발):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확고할 것이며

獨立不懼(독립불구): 홀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遯世无悶(돈세무민): 은둔함에도 번민함이 없을 것이다.


이 시조는 오늘날 전해져 내려오는 고시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데 늙음에 대한 한탄이 서려 있어 백발가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춘산에 눈 녹인 바람 불더니 간 데 없다.

적은 듯 빌어다가 머리위에 불리고저

귀 밑의 해 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선비로서의 기개뿐만 아니라 유신, 관리로서의 면모도 전해져 온다.

충선왕 즉위 원년(1308년)에 우탁은 감찰규정으로 있었다. 왕이 부왕(충열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가까이 지내자 선생은 흰옷에 거적과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가 목숨을 걸고 인륜과 도덕을 간언했다.

이 일이 있고난 뒤 충선왕이 부끄러움을 느껴 다시는 선왕의 후궁과 통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로 벼슬을 사퇴하고 복주의 예안현(안동시 와룡면 선양동, 안동댐 건설로 수몰)으로 퇴거하였다.

그 뒤 충숙왕이 역동의 충의를 높이 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만년에 잠깐 성균관좨주직을 맡아 후진을 가르쳤다. 1342년(충혜왕 3)에 생을 마쳤다. 시호는 문희공이다.

 

                                                                역동서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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