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의 기원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스포츠, 그것이 골프이다 !!
그런 대중적인 스포츠 골프도 명칭의 어원이나 발상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특히, 골프의 기원을 두고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어떤 이는 이미 14세기 중반에 영국인들이 즐겼다고 하는 프렌다스의 콜이라고 하는 놀이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중세기에 양치기들이 양을 돌보는 동안 지팡이로 자갈을 치던 놀이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스코틀랜드가 골프의 발상지라고 인정되고 있으나 애초에 골프가 크게 성행하던 곳은 베네룩스 3국 일대이었다는 설도 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5세기에 유행되기 시작했는데 네델란드에서 15세기 훨씬 이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몇 점의 회화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 가운데 초기의 클럽과 매우 흡사한 모양의 구부러진 스틱에 기대고 서있는 네델란드인의 그림과 헤드가 큰 클럽을 팔에 안고 서 있는 소녀의 그림이 있다.
13세기에 행해진 것으로 증명된, 얼음위에서 끝이 굽은 길죽한 작대기를 가지고 볼을 치며 즐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16세기 네덜란드 벽화 등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그것이 골프를 많이 닮았을뿐 아니라 그 놀이를 네덜란드에서는'콜벤' 이라 불렀고 작대기를 '콜프' 라고 했다고 한다. 이름까지 유사했기 때문에 이것이 골프의 유래가 틀림 없다고 생각해 왔다.
스코틀랜드에서 골프가 정식으로 선을 보이기 이전에 북부 프랑스 및 네델란드에 골프와 아주 비슷한 게임이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도 이곳의 원주민들이 이 게임을 하는 것을 간간이 볼 수 있는데 골프보다 당구나 하키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네델란드인들 사이에서 "KOLF" 불린 이 게임은 2피트 높이에 둘러싸여 가로가 25피트 세로가 60피트 되는 지면이 평평한 장방형 구역 내에서 행하는 것이었는데 이 장방형 구역의 한 편 담벽에서 10피트 떨어진 위치에 직경 5인치 기둥을 좌우에 세우고 반대편에 공을 타구해 봉을 쳐서 맞추는 게임이었다.
경기자는 놋쇠의 무거운 헤드를 붙인 4피트 길이의 클럽과 철사로 꿰맨 야구 공만한 크기의 탄력 있는 공을 사용하였다. 두 개의 기둥을 가장 적은 횟수로 맞춘 자가 승자가 되었다.
비겼을 경우에는 공의 위치와 암벽과의 근접거리로 판정하였다. 따라서 힘보다는 기술과 섬세한 터치가 요구되는 게임이었다. 이 점은 당구나 크로케와 같다.
일부 사람들은 영국이 골프의 발생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글라스터 성당의 창문에 그려진 그림에서 비롯된다. 그 그림에는 마치 짧은 어프로치 샷을 하는 것과 같이 한 골퍼가 스윙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 창문은 1340 년과 1350년 사이에 설계되어 세워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그러한 행동을 그림으로 나타낸 최초의 기록임에 틀림없다. 다른 조사자들은 일본 여성들이 인도어 에서 클럽을 가지고 플레이하는 삽화를 발견하고 이것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로부터 전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 학설로는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을 있다.
네덜란드 역사학자 반 핸겔은 골프는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스펠 메든 콜브'로 불리워졌던 게임에서 유래된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후에 '헤트 콜브'라고 짧게 불리워진 다음 '콜프'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게임은 처음 4개의 홀에서 플레이되었고 각홀은 1천야드의 길이를 갖고 있다.
이들이 스코틀랜드에 이 게임을 소개한 주인공들이며 이 이론은 많은 수의 '깃털'에 의해 증명된다는 것이다.
최초의 골프 볼은 깃털로 채워진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이 깃털은 다름아닌 네덜란드가 스코틀랜드에 16세기동안 수출했던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스코틀랜드에서 플레이 되었던 '골프"와 네덜란드에서 플레이 되었던 '콜프'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있음직함에도 불구하고 유사점만큼이나 많은 차이점도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 골퍼들중에서는 골프가 스코틀랜드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해줄수 문서는 아주 희박하지만 골프 볼이 1452년에 스코틀랜드의 동전 10실링에 판매되었다는 기록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특히 1457년 3월 6일의 기록은 스코틀랜드에서 골프가 성행하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는 최초의 기록이다. 제임스 2세의 14대 회의는 "축구와 골프를 금지한다"는 내용을 공표했다. 이 금지령은 1491년 제임스4세 치하에서 다시 포고되었다. "영토보존에 방해가 되는 축구와 골프 기타 다른 부적합한 스포츠는 법으로 금지시킨다." 축구와 골프는 영국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무술연습을 방해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골프를 즐겼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영원히 숙제로 남겨질 것이다.
10년후 제임스 4세는 그 자신이 골프를 즐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의 왕족 결혼에서도 골프게임이 확장되었다. 제임스 5세의 딸 마리 여왕은 프랑스 황태자와의 결혼식이 치러졌던 프랑스에서 골프를 쳤다.
그녀의 클럽은 캐디라는 사관학교 생도에게 운반하고록 했다.
이것이 아마 오늘날 캐디라는 이름과 직업이 발생한 유래가 될 것이다.
골프의 기원에 대한 학설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1886년 월터 심슨경에 의해 소개된 것이다. 그의 주장은 한 양치는 목동이 해변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양들을 돌보고 있는 것에서 비록된다. 모래 둔덕이 있는 해안에서 목동은 지팡이로 조그만 돌멩이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어느날 그 돌멩이가 토끼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는 다시 그것을 시도했고 이를 지켜보던 다른 양치기도 이를 따라했다. 이것이 골프의 탄생이다. 양치기의 지팔이는 오늘날 클럽으로 발전했고 돌멜이는 이보다 부드러운 깃털 볼이 되었다.
반면 해안 코스의 길이는 매우 다양했으며 홀의 수도 많았다. 라이트에 있는 최초의 코스는 414, 461, 426, 495, 435야드 등의 5개 홀로 구성되었으며 블랙하트는 7개홀, 세인트 앤드류스는 아웃코스 11개, 백코스 11개, 총 22개 홀로 이뤄졌다. 1764년 윌리암 클레어가 22개 홀에서 121타를 쳐 세인트 앤드류스는 평균 스코어를 보다 높게 만들기 위해 각 코스에서 2개 홀씩, 총 4개 홀을 없앴다. 이것이 오늘날 모든 코스의 표중이 되고 있는 18 홀의 유래이다. 일반적으로 게임은 아웃 코스에서 똑바로 진행되어졌다가 백 코스에서는 양 방향으로 할 수 있었다.
1735년 이후 친구들로 구성된 단체가 클럽을 형성하였다. 에딘버그의 로얄 버기스 단체가 당시에 구성된 첫 클럽이며 이후 세인트 앤드류스의 로얄 앤션트 골프클럽<1754>등이 등장했다. 같은 해에 에딘버그 골퍼들의 명예회원사가 건립되었고 이들은 경쟁에서 우승한 골퍼를 위한 시상이 있어야 한다고 의회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이 '은' 골프 클럽이었으며 이 클럽의 공식적인 최초 주인공은 외과의사인 존 래트래이에게 돌아갔다.
규칙은 경기를 위해 필요로 했으며 이듬해에 라이트 코드의 13개 규칙이 세인트 앤드류스의 골프클럽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 규칙의 기본은 오늘날까지 바뀌지 않았으며 40페이지가 넘는 오늘날의 골프규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와 같이 초창기 골프는 수백년동안 확장되어 갔다. 그러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골프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면서 회원제가 사라지고 스코틀랜드의 많은 초기 골프클럽들 역시 문을 닫았다. 세인트 앤드류스 조차 법적 논쟁에 휘말리는 위기를 맞았다. 이와같은 위기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빈부의 계층 구분을 발생시킨 프랑스 혁명의 영향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전까지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었던 골프는 신사들의 게임으로 특정화되어 갔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당시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사람들은 식량이 우선적으로 필요로 했다. 이에 따라 코스는 밀과 같은 농산물을 경작하기 위해 파헤쳐졌다. 또한 인플레이션은 많은 코스들의 재정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이와같은 위기도 일시적. 1850년 골프는 다시 재건되었고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제 1의 국민 오락게임으로 정착되었다. 나아가 골프는 영국과 유럽은 물론 멀리 바다 건너 전 세계로 확장됐다.